유라는 벤치에서 일어난 뒤 한동안 같은 자리 주위를 서성거렸다. 언덕 위 공기가 조금 더 차가워졌고, 구름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점점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시간의 감각이 흐려지면서 몸 안에 남은 것은 묘한 긴장과 어딘가로 끌려가는 느낌뿐이었다.
도시에 도착한 첫날이었다. 아직 숙소도 잡지 않은 상태였고, 어디서 밤을 보낼지도 정하지 못한 채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쪽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확신이 단단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이 도시에서 자신과 연결된 단 하나의 단서를 확인하는 것.
유라는 가방을 더 꼭 끌어안았다. 캔버스 천 너머로 종이의 얇은 감촉이 전해졌다. 버스에 오르기 전부터 몇 번이고 꺼냈다 접었다를 반복했던 메모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하층 항만 구역 레인 사십칠 바람막이 창고.
문장 하나에 불과한 주소. 그러나 지금 유라에게 이 도시는 그 문장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빛의 항로는 절벽을 따라 길게 이어지고 있었고, 가로등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도로 아래로 눈을 돌리면 항만의 풍경이 흐릿하게 펼쳐졌다. 컨테이너들이 바둑판처럼 놓여 있고, 크레인들은 마치 멈춘 거대한 손처럼 서 있었다.
그 아래 어딘가에 레인 사십칠이 있을 것이다.
유라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벤치에서 내려왔다. 언덕 아래로 향하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 더 미끄러운 느낌이었다. 내려갈수록 빛의 각도가 바뀌고, 건물 사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골목마다 다른 냄새가 풍겨왔다. 국물 냄새, 기름 냄새, 눅눅한 곰팡이 냄새, 오래된 담배와 공업용 윤활유의 냄새가 뒤섞였다. 이 도시 사람들에게는 오래전부터 익숙했을 향기들이겠지만, 유라에게는 모두 낯선 신호처럼 다가왔다.
언덕을 내려가 항만 쪽으로 가까워지자 도로 위 차량 소리가 줄어들고, 대신 멀리서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와 선박의 엔진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콘크리트 바닥에는 기름 얼룩과 검은 물자국이 여기저기 번져 있었다.
유라는 손에 쥔 약도를 다시 펼쳐 보았다.
약도에는 항만 내부의 복잡한 길 대신 몇 개의 기준점만이 간단하게 그려져 있었다. 오래된 곡물 창고, 세금 징수소로 쓰였다가 지금은 비어 있다는 건물, 그리고 레인 사십칠이라고 표시된 좁은 통로.
바람은 점점 차가워졌다. 바다에서 밀려온 공기가 건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목덜미를 스쳤다.
유라는 가방 속에서 오래된 사진을 꺼냈다. 사진 속 두 소녀가 서로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한 명은 분명 자신이었다. 아직 어린 얼굴이었고, 볼살이 더 통통했다.
다른 한 명은 지금의 유라보다 약간 나이가 많아 보였다. 눈가에 작은 주름이 잡혀 있었고, 웃을 때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는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사진 뒷면에는 조용한 필체로 적힌 이름이 있었다.
유라
리세
유라는 그 이름을 손가락으로 한 글자씩 천천히 짚었다.
리세.
입 안에서 조용히 굴리는 순간 이상한 감각이 올라왔다. 오랫동안 부르지 않아 혀에서 잊혀진 이름을 다시 꺼내는 것 같은 느낌. 익숙함과 낯섦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지만 기억은 여전히 흐릿했다.
언제 이 사람을 만났는지, 어디서 함께 시간을 보냈는지, 왜 사진이 단 한 장만 남아 있는지,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진이 말해주는 사실은 딱 하나였다.
어린 시절 어느 순간, 유라는 분명 리세라는 이름을 가진 누군가와 깊이 엮여 있었고, 그 감정은 사진을 찍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 이후의 시간은 잘려 나간 필름처럼 비어 있었다.
유라는 사진을 다시 가방에 넣고 걸음을 서둘렀다.
항만 입구를 지나 안쪽 통로로 들어서자 풍경은 더 거칠어졌다. 도로 대신 좁은 레인들이 격자처럼 얽혀 있었고, 창고 건물들이 높은 벽처럼 양쪽을 막고 있었다. 화물 트럭들이 천천히 움직이며 레인들을 가로질렀고, 사람들은 형광 조끼를 입고 분주히 오갔다.
공기에 떠다니는 먼지와 철 냄새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유라는 약도를 따라 한 레인씩 숫자를 확인하며 걸었다.
서른일곱, 마흔, 마흔둘, 사십오.
숫자가 커질수록 사람의 발길이 줄어들었다.
마침내 레인 사십칠이라는 퇴색된 번호가 적힌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유라는 그 앞에서 멈춰섰다.
레인 사십칠은 다른 통로보다 더 좁고 어두웠다. 한쪽은 오래된 벽돌 창고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다른 한쪽은 아직 쓰이지 않은 컨테이너들이 쌓여 있었다. 바닥에는 오래전 빗물과 기름이 섞여 만든 얼룩이 거무스름하게 굳어 있었다.
사람 그림자는 거의 없었다.
안쪽으로 몇 걸음 더 들어가자, 눈에 익지 않은 간판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바람막이 창고.
창고 입구 위에 녹슨 금속 글자가 매달려 있었다. 일부는 떨어져 나가 글자의 모양이 뭉개져 있었지만, 유라는 그것이 바람막이라는 단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심장이 세게 박동했다.
이 주소는 자신이 메모에 적어 두었던 바로 그 주소였다. 오래전부터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그 여섯 글자의 이름.
유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에 오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생각해왔다.
바람막이 창고에는 과거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버리고 온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잊어버린 채 두고 간 무언가가.
그녀는 창고 입구 앞에 섰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시멘트 계단 위에는 낙엽과 쓰레기가 쌓여 있었고, 문손잡이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겉보기에는 사용하지 않는 창고처럼 보였다.
그러나 계단 위 어느 지점에, 누군가가 일부러 남겨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유라는 허리를 숙여 바닥을 살폈다.
계단 모서리와 문틈 사이, 낡은 시멘트가 부서지며 생긴 작은 틈 속에 얇은 카드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유라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카드는 손가락만 한 크기였고, 한쪽 모서리가 잘려 나간 것처럼 모양이 약간 어긋나 있었다. 카드 겉면에는 흐릿한 문장이 프린트되어 있었고, 곳곳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카드 중앙에는 낯선 문양과 함께 심연극장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또 다시 등장한 이름.
언덕 위 지도에서 본 단어. 누군가가 지도 위에 일부러 적어 놓았을 것 같은 이름.
심연극장.
그것은 단지 도시 어디엔가 있는 낡은 공연장의 이름일지 모르지만, 유라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이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도시 밑바닥 어딘가에 숨겨진 통로 같은 것이라고.
카드를 뒤집어 보았다.
뒷면 한켠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리세 출입 허가 구역.
유라의 숨이 멎었다.
이 도시에 오기 전까지, 리세라는 이름은 사진 뒷면에 적힌 글자일 뿐이었다. 어떤 표정인지, 어떤 목소리를 가졌는지, 어떤 곳에서 살았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유라의 손에는 그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진 출입 카드가 쥐어져 있었다.
이 카드는 오래전에 누군가가 갖고 다니던 것이다.
그 누군가는 심연극장이라는 장소와 연관이 있었고, 바람막이 창고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리세였다.
유라는 발밑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현기증을 느끼며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도시는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자신과 엮여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고 문을 바라보았다.
자물쇠는 낡아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녹슬지는 않았다. 손으로 잡아당기자 딱딱 소리를 내며 조금 흔들릴 뿐이었다.
카드를 문 근처에 가져다 대보았다.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출입 카드라고 해서 모든 문을 자동으로 열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 카드는 아마 심연극장이라는 공간 어느 한쪽에서 쓰이도록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라는 이상하게도 이 카드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이 도시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자신에게, 지금 손에 남은 단 한 가지 분명한 단서는 바로 이 카드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카드를 가방 안쪽 깊숙한 곳에 넣었다. 사진과 메모와 노트 사이에 끼워 두었다.
심연극장, 리세, 바람막이 창고, 레인 사십칠.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엉키며 돌아다녔다.
창고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니, 옆면 벽에는 오래된 포스터가 찢어져 붙어 있었다. 공연 일정인지, 광고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색이 바랜 종이 위에 일부 글자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심연, 그림자, 항로, 라는 단어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유라는 손끝으로 그 글자들을 더듬다 말고 손을 거두었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한 번에 억지로 되짚으려 하면, 오히려 기억의 문은 더 굳게 닫힐 것이다.
지금은 단서를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손에 남은 단 하나의 단서.
리세.
그 이름은 이제 사진 속 잉크나 종이 위의 기록을 넘어, 실제로 이 도시에 살아 있었던 사람의 흔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유라는 창고에서 몇 걸음 물러났다.
항만 쪽에서 경적 소리가 울렸다. 컨테이너를 실은 화물선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도시의 낮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사람들은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상적인 움직임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흐름이 생겨나고 있었다.
언덕 위 빌라의 한 방에서는 한 여자가 낡은 침대에 앉아 같은 카드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카드에도 리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이름은 그녀의 목에 걸린 금속 조각과 이상한 모순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리테라고 불렀지만, 문 밖의 존재는 문틈 사이로 리세라는 이름을 흘리고 떠났다.
두 여자는 서로를 몰랐다.
그러나 도시가 품고 있는 균열은 이미 두 사람을 조용히 마주 보게 만들고 있었다.
유라는 레인 사십칠을 빠져나왔다.
해가 조금 더 기울었다. 항만 위 하늘은 회색에서 서서히 어두운 청색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가로등이 한두 개씩 깜빡이며 깨어날 준비를 하는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빛의 항로로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의 얼굴만으로는 이 도시를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도로가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은 언제나 밤이었으니까.
그녀는 언덕으로 향하는 길을 되짚어 올라갔다.
항만에서 언덕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사람들의 발길과 자동차의 바퀴에 닳아 반들반들해져 있었다. 구석구석에는 오래된 포장마차와 간이 음식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값싼 음악이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유라는 그런 소리들을 등 뒤로 흘려 보내며 계속 걸었다.
언덕 중턱 광장을 지나칠 때, 담벼락에 기대 앉아 있던 노인이 눈을 들었다. 그는 아까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마치 그 사이에 시간 따위는 흐르지 않은 듯했다.
유라가 지나치려는 순간, 노인은 낮게 중얼거렸다.
또 하나 왔구나.
말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았고, 목소리는 바람과 섞여 금세 흩어졌다.
유라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지만, 노인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이 도시에 도착한 첫날부터 너무 많은 질문을 한꺼번에 던지기에는 자신의 마음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언덕 꼭대기에 다다르자 빛의 항로는 다시 절벽을 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도로 위로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항만은 점점 어둠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유라의 꿈 속 장면과 닮아가는 순간이었다.
가로등 불빛은 길 위에 긴 띠를 남겼다. 도로를 따라 규칙적으로 이어진 빛의 띠는 마치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실처럼 보였다. 빛의 항로라는 이름이 다시 한번 마음 속에서 또렷해졌다.
유라는 도로 난간 가까이 다가섰다.
바람이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머리카락이 눈가로 흩어져 시야를 잠깐 가렸다.
그녀는 도로 한가운데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떤 방향으로 걸어야 할지, 어디에서 걸음을 멈춰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 속 어딘가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조용히 안내하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라.
뒤돌아보지 마라.
그 문장은 그녀가 노트의 마지막 장에 적어 두었던 문장과 닮아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절대 뒤돌아보지 마라.
그 문장을 언제 적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자신 또한 지금과 같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빛의 항로를 따라 몇 분쯤 걸었을 때, 유라는 문득 한쪽 가로등 아래에서 멈춰 섰다.
이 지점이 특별해서 멈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발걸음이 이상하게도 이 자리에서 더 나아가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난간을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항만의 불빛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엔진 소리가 바다 위 얇은 안개를 울렸다.
유라는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길게 뻗은 계단, 아래에서 올라오는 푸른 빛, 그 계단을 내려가는 누군가의 뒷모습.
그 뒷모습은 어쩐지 자신과 닮아 있었다. 아니면 자신이 아닌 또 다른 누군가였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손에는 작은 카드가 쥐어져 있었다.
심연극장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카드.
그 카드의 뒷면에는 리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그림은 너무 생생해서, 눈을 감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유라는 천천히 손을 들어 허공을 더듬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을 찾으려는 사람처럼.
그러나 손끝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대신 팔목 주변에서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거기 손목을 쥐고 있다가 방금 놓아준 것 같은 감촉.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온기.
유라는 갑자기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이 도시에 온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누구와도 인사를 나누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도시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다는 듯, 곳곳에서 같은 이름을 내밀고 있었다.
리세.
그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종이 위의 잉크가 아니었다.
레인 사십칠의 창고 계단에서 발견한 카드, 가방 안에 숨겨진 오래된 사진, 도시 안내 지도에 낙서처럼 적혀 있던 심연극장이라는 이름, 그리고 언덕 위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노인의 말조차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방향의 끝에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마도 이미 도시 어딘가에서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덕 아래 빌라의 한 방 안에서도 또 한 사람이 카드를 쥔 채 자신의 이름을 둘 사이에서 갈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리테라는 이름과 리세라는 이름 사이에서.
유라는 난간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도시의 불빛이 뒤로 물러났다. 가로등 아래로 떨어진 자신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그림자는 바닥 위에서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그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발을 들었다.
그림자가 따라왔다.
한 걸음 더 내디뎠다.
그림자는 또다시 뒤따랐다.
그 순간 유라는 깨달았다.
아직 자신의 그림자는 온전히 자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손에 남은 단 하나의 단서가 이름이라면, 발밑에 남아 있는 단서는 그림자였다.
언젠가 어떤 사람은 말했었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은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유라는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빛의 항로 위에서 흔들리는 그 그림자를.
그리고 결심했다.
이 도시에서 해야 할 일은 딱 세 가지뿐이라고.
리세라는 이름의 주인을 찾는 것,
심연극장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그림자를 잃지 않는 것.
해는 완전히 기울어 가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더 켜졌다.
빛의 항로는 이제야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라는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언덕 아래, 어두운 빌라의 한 방에서 한 여자가 같은 순간 숨을 골랐다.
리테는 손에 쥔 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드 뒷면에 새겨진 리세라는 이름을.
두 사람의 손에는 같은 이름이 단서로 남아 있었다.
그 이름이 이 도시를 관통하는 유일한 길이자, 서로를 향한 길이라는 것을 아직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