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11부 문 너머에서 마주한 낯선 방과 잊혀진 첫 이름

문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떨리면서 천천히 열렸다. 그 떨림은 두 사람의 손끝을 타고 몸 전체로 퍼져 들어왔고, 마치 오래된 기억이 부활을 준비하며 신경줄기를 따라 움직이는 듯한 이상한 전율을 만들었다.

유라와 리테는 숨을 삼켰다. 문이 열리면서 그 안쪽에서 뿜어져 나온 공기는 지하의 어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는데, 그냥 ‘온도’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공기. 시간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곳의 냄새였다.

두 사람은 문턱 앞에서 몸을 굳혔다.
남자는 한 발 뒤에 서서 조용히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 틈 사이에서 흘러나온 빛은 하얗지 않았다.
은빛도 아니었다.
빛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일반적인 자연광과는 전혀 다른 성질이었다.

어둠이 막 태어난 것처럼, 혹은 태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흐르는 빛.
불규칙하게 움직이지만 일정한 패턴을 가진, 살아 있는 그림자와 같은 빛.

리테는 본능적으로 손을 움켜쥐었다.
유라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문이 완전히 열린 뒤, 안쪽 공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곳은 극장이 아니었다.
심연극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장소이지만, 극장다운 무대나 객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극장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 이유가 더 의문이 들 만큼 공간은 낯설고 기묘했다.

방은 원형으로 되어 있었다.
벽면은 돌처럼 보였지만 움직였다.
건축물의 벽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의 내부 같은 느낌이었다.
표면이 근육처럼 꿈틀거리지는 않았지만, 아주 미세한 파동이 공간 전체를 감돌며 벽의 질감을 바꾸고 있었다.

방 안에는 어떤 물건도 없었다.
가구도, 장식도, 불도 없었다.

오직 방 중앙에 놓인 작은 테이블 하나만이 존재했다.
테이블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단순했고, 제단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작았다.
정사각형의 돌 구조물 위에 검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는 빛을 흡수하고 있었고, 주변의 공기조차 상자 쪽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리테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게… 뭐야

남자는 문턱에 서서 천천히 대답했다.

너희가 잃어버린 첫 기억의 일부다.
심연극장은 기억을 먹지만 잃어버린 기억을 보관하기도 해.
저 상자는 너희 둘 중 한 사람의 기억을 담고 있지.

유라는 그 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한 사람의 기억.
둘 중… 한 사람.

그 말은 의미심장했다.

리테는 테이블을 바라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상자에서 뿜어져 나온 기류는 없었다.
공기는 고요했고, 소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상자 앞에 다가갈수록 그녀의 가슴에서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밀려왔다.

상자를 열면 무언가가 기억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과, 동시에 그 기억을 마주하면 다시는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유라는 리테를 따라 한 발짝 다가왔다.
상자의 표면은 검은 돌처럼 보였으나, 손끝을 가까이 가져가는 순간 상자가 마치 그녀들의 움직임을 감지한 듯 아주 미약하게 떨렸다.

남자가 말했다.

상자를 열기 전에 명심해야 할 게 있어.
이 안에 있는 기억은 한 사람의 것이지만, 너희 둘 모두를 바꿀 기억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본래 하나였으니까.

말의 의미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하나였다는 말.
유라와 리테가?
그것은 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유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하나였다고
말이 돼? 우린 서로 다른 사람인데

남자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기억은 너희를 분리해서 떨어뜨려놓은 것뿐이야.
이 문을 지나면서 역사도 바뀌고 이름도 바뀐다.
이 도시에서 사라진 이름은 기억에서 지워지고, 다시 만들어진 이름은 진짜가 된다.
그리고 너희가 지금 사용하는 이름은 둘 다 진짜가 아니지.

리테는 숨을 멈추었다.

진짜 이름.
지워진 이름.

그리고 모든 곳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이름.

리세.

그 이름이 다시 마음속을 울렸다.
마치 벽 안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 이름을 속삭이고 있는 것처럼.

유라는 상자에 손을 얹으려다 멈추었다.
손끝이 차갑게 떨렸다.

만약 상자를 열면…
상자 안의 기억이 그녀들 둘 중 한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 기억이 누구의 것인지 아는 순간, 이 둘의 관계도 완전히 바뀔 것이다.

리테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열게.

유라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리테의 말에 반대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상자 안의 기억이 자신에게 돌아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리테는 손을 상자의 고리에 가져갔다.
고리는 쇠로 된 것이 아니라, 마치 돌이 스스로 틈을 만들어 만든 형태였다.
손으로 잡는 순간 고리는 그녀의 체온을 기억하는 듯 천천히 일렁였다.

남자는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열어라.
기억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한다.

리테는 천천히 고리를 잡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가 켜지는 소리는 없었다.
특유의 금속음도 돌 부딪히는 소리도 없었다.

그저 세상이 바뀌는 소리 같았다.

상자 안에는 종이 한 장이 있었다.
오래된 종이였지만 글씨는 놀라울 만큼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종이의 테두리는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마치 누군가가 그것을 이 공간에 영원히 고정하기 위해 시간을 멈춰 놓은 것처럼 보였다.

리테는 종이를 꺼냈다.
손끝이 닿는 순간 종이는 따끈하게, 혹은 살아 있는 듯한 감촉을 남겼다.

종이 위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리세를 찾을 것.
그러나 리세는 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리테와 유라의 호흡이 동시에 멎었다.

리테는 종이를 들고 뒷걸음질 쳤다.
유라는 충격에 손을 떨며 종이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게 첫 번째 기억이지.
리세는 이름이 아니라 역할이다.
너희 둘 중 한 사람이 그 이름을 버리고, 다른 한 사람이 그 이름을 이어받은 것.
그러나 여기 들어오기 전, 기억은 둘로 갈라져 버렸다.

유라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리세라는 게… 가능한 거야
아니면 너가 리세야
리테

리테는 종이를 들고 손끝을 떨었다.

나는… 몰라.
하지만 내 목걸이에는 리테라고 적혀 있어.
그런데… 지워진 자국도 있어.
아마도 내 이름은 원래…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남자는 덧붙였다.

이 도시에서는 기억을 잃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름이 생기지.
그리고 원래 이름은 심연 아래에서 잃어버린다.
너희 둘 중 누가 먼저 리세였는지는,
저 문 너머에서 다시 확인하게 될 거야.

유라는 천천히 리테의 손을 바라보았다.
리테도 유라의 눈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있는 공기가 이상하게 울렸다.
마치 어떤 연결이 갑자기 재점화되는 듯한 느낌.

이제 상자는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남자가 말했다.

기억은 종이 한 장이 아니야.
저건 시작일 뿐이지.
문 너머에는 더 많은 기억들이 기다리고 있어.

유라는 문 너머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 어둠 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동시에 깨달았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그들은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닌 채로 나오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남자는 마지막 경고를 남겼다.

문을 닫기 전에 한 가지 기억해.
심연은 너희 둘 중 하나를 돌려보내지 않아.

둘은 서로를 보았다.

그 어떤 밤보다 깊고,
그 어떤 기억보다 무거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문 너머로 첫 발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