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13부 심연극장의 심장부에서 들려오는 세 번째 목소리

공간의 울림이 점점 깊어지면서 리테와 유라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발밑의 바닥은 여전히 투명해 보였고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러나 발을 디딜 때마다 아래의 공간은 보이지 않는 파문을 만들어냈고 그 파문이 벽면까지 전달되어 사라진 이름들의 잔향을 불러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곳은 분명 누군가의 기억이 머물던 장소였으며 동시에 누군가의 이름을 지우는 장소이기도 했다.

리테는 손끝으로 벽을 스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걷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벽은 없었지만 그녀의 손끝은 공기를 따라 흐르는 보이지 않는 파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 파동은 살아 있는 것처럼 리듬을 가지고 있었고 마치 오래전부터 누군가가 그녀에게 신호를 보내던 방식처럼 느껴졌다.

유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문은 여전히 열린 채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이미 들어온 두 사람에게는 돌아갈 길이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문은 길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주기 위해 열려 있었고 이곳을 통과한 순간 다시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둘은 더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바닥 아래에서 빛이 올라왔다.
그 빛은 색이 없었다.
빛의 형태는 있었지만 색이라는 개념을 벗어난 빛이었다.
마치 형체가 있는 어둠처럼 빛은 사방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 빛 사이를 가르며 걸어가자 어느 순간 시야 앞에 길이 생겨났다.
길은 천천히 위로 떠올라 두 사람 앞에서 나타났다.
그 길은 나무도 금속도 아니었고 돌이 아니기도 했다.
오히려 기억의 조각들로 만들어진 듯한 길.
발을 디딜 때마다 밑바닥에서 무언가 속삭이는 것 같은 느낌.

유라가 조용히 말했다.

너도 들리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뭔가가 우리를 부르고 있어

리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것들
모두 우리를 알고 있는 것 같아

둘은 길 위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러다 길 끝에서 마침내 새로운 구조물이 나타났다.
거대한 문 여러 개가 원형 구조물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문들은 방금 지나온 문과 전혀 달랐다.

첫 번째 문은 빛을 머금고 있었고
두 번째 문은 그림자를 깊게 안고 있었으며
세 번째 문은 공명처럼 가벼운 울림을 냈다.
각각의 문은 서로 다른 존재를 상징하는 듯 보였고
어떤 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들이 마주하게 될 기억도 달라지는 것 같았다.

유라가 놀란 듯 말했다.

어쩌라는 거지
이렇게 많은 문이 있는데
어디로 가라는 건데

그때였다.
문과 문 사이에서 아주 미약한 진동이 일었다.
그리고 그 진동이 점점 강해지며 공간 전체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이 동시에 느꼈다.
어떤 문이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문이 그들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세 번째 문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문 표면이 부드럽게 흔들리며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울림은 두 사람의 발끝과 손끝을 지나 심장까지 전달되었다.

리테는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은 그녀를 감지하자마자 얇은 선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선은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었고
마치 누군가가 문 안쪽에서 바깥으로 손을 내밀며
오래전부터 기다렸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유라는 리테를 따라 문 앞에 섰다.
문이 옆으로 갈라지고 빛 아닌 빛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낮고
기억 속에서 들은 적 있는 듯한
그러나 한 번도 실제로는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

리세
그 이름이 아주 선명하게 울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두 사람을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유라는 작은 숨을 삼켰다.

또 다른 리세가 있는 거야
이 문 너머에 있는 게
그 사람인 거야

리테는 심장이 떨리는 걸 느끼며 문 틈을 바라봤다.
그녀의 손이 떨렸지만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문 안쪽에서 그림자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그림자는 형체가 있었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분명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존재는 숨을 쉬고 있었고
손끝을 움직이며 문 안쪽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리테는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는 상태로 말했다.

누구지
누가 있는 거지

문 틈에서 나온 존재가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어둠처럼 보였지만
그 어둠이 살아 있는 생명체의 형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유라의 심장이 멎을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 목소리
그 울림
그 미세한 억양

그것은 너무 익숙한 목소리였다.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어렴풋이 들린 목소리
다정하고
그러나 어둠을 품고 있는 목소리

리테는 걸음을 빼려고 했지만
발이 바닥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 존재는 다시 말했다.

너희 둘
여기까지 왔다는 건
마침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겠지

목소리는 차갑고 따뜻했다.
친근하고 낯설었다.
모순된 감정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숨조차 들이쉬기 전에
그 존재는 고개를 들어 얼굴의 윤곽 일부를 드러냈다.

유라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입술이 떨렸고
손끝이 흔들렸다.

이 사람은
어디서 본 적이 있다

그녀는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그 얼굴이 ‘자신의 얼굴’ 중 한 부분과 닮아 있었다.

리테도 마찬가지였다.
눈동자
턱선
입술의 각도
모든 것이 자신과 닮아 있으면서도 완전히 다르지 않았다.

그 존재는 말했다.

내 이름은
리세

마침내 세 번째 목소리가
심연극장의 심장부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유라도
리테도
숨을 쉴 수 없었다.

그 존재는 자신을 설명하지 않았다.
두 사람도 물을 수 없었다.

그저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기억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아무도 해석할 수 없는 형태였다.

그리고 그 순간
심연극장이 다시 울렸다.

진정한 이름의 균열이
마침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