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심장 아래에서 터져 나온 울림은 이제 공간 전체에 퍼져 있었다.
느리게, 그러나 무섭도록 규칙적인 파동이 바닥을 타고 올랐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심장이 어둠 속에서 깨어나며 천천히 박동하는 소리처럼.
유라와 리테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느끼는 두려움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심연극장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저 존재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라
어떤 형태를 가진 ‘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
이제는 그들의 뼛속까지 들어와 있었다.
리세는 침착하게 두 사람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조심해야 해
저 아래에서 깨어나는 존재는
무엇을 원하고
왜 너희 둘을 쫓아왔는지
너희가 알기 전까지 멈추지 않으니까
유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존재는…
정확히 뭐야
도대체 어떤 존재길래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었던 건데
리세는 고개를 기울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가 말을 시작한 순간
바닥 아래의 어둠이 더 크게 일렁였다.
심연에 사는 존재는
기억을 먹어
그리고 먹힌 기억은
한 번도 혼자 남겨둔 적이 없지
유라는 이해하지 못했다.
혼자 남겨둔 적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
리세는 그 질문을 기다린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기억은
언제나 두 개씩 묶여 있어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둠
용기와 두려움
희망과 절망
기억 속 감정은 언제나 쌍으로 존재하지
그 존재는
그 쌍 중 하나를 먹고
남은 하나를 그림자로 만들어
도시로 보내는 거야
유라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 도시에 오게 되었는지
왜 기억을 잃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리테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우리가 혼자서는 온전한 기억을 갖지 못했던 이유가
기억이…
둘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야
리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짙은 어둠을 품고 있었다.
너희 둘은 원래 하나였어
한 사람
한 감정
한 기억
그러나 기억이 찢어지면서
너희의 감정도 둘로 나뉜 거야
유라는 빛
리테는 그림자
분리된 두 조각이
각자 다른 모습으로 이 도시를 떠돌아다니던 거지
그 설명을 듣는 순간
유라의 시야는 흐려졌다.
갑자기 몇 년 전 불쑥 떠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이유 없이 느껴졌던 상실감
설명할 수 없었던 고독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느낌
누군가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느낌
리테 역시 자신의 감정이 설명되는 걸 느꼈다.
어디를 가든 따라붙던
설명할 수 없는 공포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압박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대체하려 한다’는
이해할 수 없었던 불안
그 모든 것이 이제야 의미를 가졌다.
두 감정이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빛과 그림자 중
누군가가 사라지면
다른 한쪽도 무너지는 구조였다.
그러는 사이
바닥 아래의 심연은 더 크게 들끓기 시작했다.
울림은 이제 ‘소리’라는 표현을 넘어
‘움직임’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리세는 뒤를 돌아 심연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단단해졌고
눈빛에는 오랜 두려움이 비치는 듯했다.
그 존재가
깨어나고 있어
유라는 목을 삼켰다.
저 존재가
우리를… 찾는 거야
리세는 곧바로 말했다.
아니
너희 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둘 중 하나를
데려가려는 거야
유라와 리테,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경직되었다.
둘 중 하나.
그 말은 너무 잔인했다.
그러나 이 심연 속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규칙이기도 했다.
리세는 계속했다.
그 존재는 항상 그래
기억의 쌍이 생기면
둘 중 더 약한 쪽을 데려가
그 기억을 먹으면
남은 조각은 사라지지
그렇게 또 한 사람이 죽고
또 한 이름이 도시에서 지워지는 거야
리테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번엔
누굴 데리러 오는 건데
리세는 조용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너희 중 한 명
그리고
한 명이 사라지면
남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해
왜냐하면
둘 다
하나의 그림자였기 때문이야
유라는 몸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 세계의 규칙은 단순했다.
잔인했고
모순적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맞는 말’처럼 느껴져서 더 무서웠다.
리테도 입술이 떨렸다.
둘이 하나였다는 사실이
이제는 공포로 다가왔다.
한 사람이 죽으면
다른 한 사람도 함께 사라지는 구조
그때
바닥 아래에서
처음으로 ‘형체’가 보였다.
심연 아래 깊은 곳
투명한 바닥 밑에서
검은 실 같은 것들이 꿈틀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머리카락처럼 가늘지만
무언가를 감싸고 조이는 힘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유라가 뒷걸음질 치려는 순간
리세가 팔을 뻗어 막았다.
안 돼
멀어지면 더 빨리 끌려가
리테는 숨이 막혔다.
뭐야
저게 뭐야
왜 우리를…
리세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기억을 먹는 존재의
그림자야
그리고 그 순간
검은 실들이 번개처럼 위로 치솟았다.
두 사람을 향해.
유라는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리테는 팔을 들어 몸을 감싸며 뒤로 물러났고
리세는 두 사람을 끌어당겨 자신의 뒤로 숨겼다.
그리고 처음으로
심연극장의 공기가
‘공포’라는 감정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리세가 낮게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그 존재가 깨어나면
너희 둘 중 한 명을 선택하겠지
유라는 멈춰버린 심장으로 말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
리테도 눈물이 맺힌 채 물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한 거야
리세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단단했고
어둠 속에서 불타는 빛이 있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유라와 리테는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리세가 말했다.
둘이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바닥 아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 올랐다.
심연극장의 모든 빛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