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 아래에서 치솟아 올라온 거대한 그림자는 이제 완전히 ‘형체’를 가진 듯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아는 생명체의 구조와 전혀 닮지 않았다.
빛을 흡수하며 기어오르는 검은 실들
그 실들이 서로 엉켜 만들어낸 커다란 덩어리
형체는 늘어났다 줄었다를 반복하며
마치 살아 있는 악몽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 존재는 공간 전체를 흔들며 울었다.
울음이라기보다는
기억을 짓눌러 깨뜨리는 소리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가장 어두운 감정을
억지로 끄집어내는 소리였다.
유라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 존재가 움직일 때마다
가슴 안에 숨어 있던 억눌린 두려움이
살갗 위로 끓어오르는 느낌.
리테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은 거대한 공포가
몸 속 두 번째 심장처럼 뛰고 있었다.
그 공포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다
둘이 원래 한 사람의 두 감정이었기 때문에
서로의 공포가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 어떤 공포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리세의 침묵이었다.
고의적으로
둘을 갈라놓았다.
그 말의 충격은
심연의 울림보다 더 깊게 두 사람을 뒤흔들었다.
유라는 떨리는 손끝을 자신의 가슴 위로 가져갔다.
너라고 했어…
정말…
네가 우리를…
리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어깨는 긴장했고
손끝은 고통에 닿은 듯 움찔거렸다.
그 침묵은 말보다 강한 고백이었다.
리테는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어갔다.
왜
우리를…
갈라놨어
우리는 원래 하나였다며
그런데 왜…
그때
계단에서 내려온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선택을 한 거야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리세는 이를 악물었다.
말하지 마
아직…
아직 그 때가 아니야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어
저 아래 존재가 깨버린 이상
모든 기억이 다시 떠오를 수밖에 없어
그는 리세와 두 사람 사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빛은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관찰자
증인
그리고 기록자
그러나 이번에는 관찰로 끝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내가 말했다.
리세가 너희를 갈라놓은 건
너희를 버리기 위해서도
없애기 위해서도 아니야
오히려
지키기 위해서였지
유라와 리테는 동시에 숨을 멈췄다.
지키기 위해서
그 말은 너무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리테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키기 위해
기억을 찢어
우리를 둘로 나눈 게
지키는 거였다고?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존재는
한 사람의 기억 전체를 먹기 위해 올라온다
하지만 기억이 둘로 갈라지면
먹을 수 없지
둘로 갈라진 기억은
둘 중 더 약한 쪽만 노릴 수 있으니까
리세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만해
말하지 마
그러나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리세는
너희 둘 중 약한 쪽 하나를
스스로 떠맡았지
그 말은
리세가 직접 말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유라가 비틀거리며 사내를 바라봤다.
무슨…
말이에요 그게…
사내는 조용히 유라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놀라울 만큼 온전했다.
리세는
한 사람으로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혼자 짊어지려고 했던 거야
그래서 둘로 찢었다
그래서 너희가 둘이 된 거야
유라는 눈이 크게 흔들렸다.
리테는 숨을 놓쳤다.
그러니까
우리의 두려움
상실
고통
기억
모든 것이
리세가 홀로 감당할 수 없었던 그것 때문이었단 말인가?
리세는 갑자기 두 사람에게 돌아섰다.
그리고 처음으로
완전히 감정이 실린 얼굴을 드러냈다.
미안해
그 한 마디는
어떤 설명보다 더 무거웠다.
유라는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그럼 왜
왜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어
왜 처음부터 숨기려고 했어
리세는 눈을 감았다.
너희가 알면
나를
죽이려고 했을 테니까
유라와 리테는 동시에 말을 잃었다.
사내가 이어 말했다.
이 도시의 규칙이 그렇지
갈라진 두 감정이 다시 하나가 되려면
둘을 갈라놓은 ‘원인’을 없애야 하거든
그 원인
그 이유
그 중심
그것은
리세 자신이었다.
유라는 입술을 떨었다.
설마
우리를 둘로 만든 사람이
너라서…
우리 기억의 규칙대로라면
우리는…
리테가 말을 이어받았다.
너를
죽여야
하나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야
리세는 다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심연 아래에서
그림자의 거대한 몸체가 일제히 흔들렸다.
그 울림은
세 사람의 대화를 다시 끊어냈다.
검은 실들이
폭발하듯 올라오며
리세를 향해 몰려들었다.
유라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내달렸다.
리테도 동시에 리세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리세는 두 사람을 밀쳐내며 외쳤다.
안 돼
저 존재는
나만 노린다
그러나 검은 실들은
리세 뿐 아니라
유라와 리테까지 향해 뻗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존재는 알고 있었다.
세 감정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서로를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서로를 지키는 순간
그들의 약점이 생긴다는 사실을.
검은 실들이 세 사람을 덮치려는 순간
사내가 크게 외쳤다.
멈춰
저것은 ‘먹는 존재’가 아니다
저건
기억을 빼앗는
‘그림자의 주인’이다
그 말과 동시에 공간 전체가 흔들렸다.
심연극장의 모든 벽
모든 길
모든 그림자가
하나의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존재가
마침내
완전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리고 유라와 리테는
그 존재가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선명히 느꼈다.
도시에서
골목에서
식당에서
문 너머에서도
그 존재는
항상 숨죽이며 보고 있었다.
이제
그 시선이 완전히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