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21부 무너지는 마음이 만든 선택

심연 아래의 존재가 드디어 방향을 정한 순간,
심연극장은 숨을 멈춘 것처럼 완전히 정적에 빠졌다.
그림자 실들이 천천히 일어섰고
공기 자체가 눌린 듯 가라앉았다.
그리고 거대한 얼굴의 형체가
리세를 향해 더 또렷하게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유라는 절박하게 손을 뻗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그는 우리를 지키려고 했어

그러나 그 말은 심연에게 닿지 않았다.
심연의 존재는 감정을 듣는 존재가 아니라
감정을 ‘먹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리테는 어둠 속에서 떨리는 눈으로 리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마른 종잇장처럼 흔들렸고
심장은 쥐어짜듯 뛰고 있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너를 데리러 왔던 거야

리세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리테의 붉어진 눈을 바라봤다.

그래
처음부터 나였어
너희 둘을 데려가려는 게 아니라
나라는 감정
원래의 기억
원래의 마음을 삼키려고 했던 거야

하지만
너희 둘을 갈라놓았던 진실은
그가 쉽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내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리세
이제는 말해야 해
그때 왜 그 선택을 했는지
왜 너 자신을 던지고
이 두 감정을 갈라서라도
지키려 했는지
이제 말하지 않으면
셋 중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어

리세는 흔들리는 어둠 속에서
두 손을 천천히 떨며 내려다보았다.

기억은 찢어졌지만
그 찢어진 틈 사이로
오래 숨겨 두었던 진실이 떠오르고 있었다.

유라와 리테는 숨을 죽이고
그를 기다렸다.

그때
리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조금 전까지
심연 아래에서 모든 것을 먹어 치우려던
그 존재의 방향도 잠시 멈추는 듯했다.

나는 너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 둘 중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둘을 갈라놓은 거야

그 말은
공기 자체를 갈라놓는 듯한 충격이었다.

유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리테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어깨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사내는 눈을 감았다.
그 역시 알고 있었던 진실이었지만
리세의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유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리기 위해…?
우리가 둘이 되어야만
누군가 한 명이라도 살 수 있었다고 말하려는 거야…?

리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존재는 하나의 감정을 완전히 집어삼키려 했어
그때 너희 둘이 합쳐져 있었다면
둘 다 동시에 사라졌겠지
하지만
감정을 둘로 나누면
한쪽만 삼켜지고
다른 한쪽은 남게 돼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내가 너희를 갈라놓은 건
둘을 다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라도 남기기 위해서였어

유라는 손을 입에 가져갔다.

그 말은 너무 잔인했다.
그러나
이 도시의 규칙 속에서는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리테의 목소리는 거의 부서진 상태로 나왔다.

그게…
살리려는 거였어…?
그게…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 역시 그림자의 감정이기 전에
한 사람의 기억이었다.

리세는 계속했다.

너희 둘을 갈라놓았던 그날
나는 정말로
둘을 다 잃을까 봐 무서웠어
그래서
기억을 찢고
감정을 나누고
한 명은 빛
한 명은 그림자로 흩어지게 만들었지

그때
검은 실 몇 가닥이 다시 튀어 올랐다.

리세의 발목을
리테의 발끝을
유라의 그림자 끝을
스치듯 지나갔다.

심연의 존재는
감정의 균열에 아주 예민했다.
특히
배신
충격
절망
이런 감정은
그 존재가 가장 좋아하는 ‘향’이었다.

사내가 재빠르게 외쳤다.

멈춰
지금 감정 흔들리면
저 존재가 바로 집어삼킨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리세의 고백
그 고백에 흔들린 두 감정
그 감정을 잡아먹기 위해
심연의 존재가 다시 크게 몸부림쳤다.

유라는 리세에게 달려가며 손을 뻗었다.

그래도…
그래도 우리를 살리려고 했던 거잖아
방법이 그거밖에 없었던 거잖아

하지만 리테의 반응은 달랐다.
그녀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속삭였다.

아니야
그는
내가 약하다고
내가 먹힐 쪽이라고
정해 버린 거야
나를…
버린 거야

유라는 눈을 크게 떴다.

리테…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야
그는 너희 둘 중 약한 쪽을 고른 게 아니라

그러나 리테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그림자가
자신보다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실이
고통을 깨우고 있었다.

그때
사내가 갑자기 외쳤다.

리테
지금 너를 향해
저 존재가 움직이고 있어

유라가 돌아봤다.
정말이었다.

심연의 존재는
리테의 그림자 쪽으로
단번에 길게 뻗어 올라오고 있었다.

유라가 리테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리테는 고개를 저었다.

손 대지 마
지금 나한테 닿으면
너까지…

그러나 유라는 이미 두려움을 눌러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 순간
유라와 리테가 서로 닿은 것은
감정의 합류를 의미했다.
둘로 나뉘어 있던 감정이
한순간 하나의 흐름처럼 섞여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심연 아래에서
더 큰 울림이 터졌다.

그 울림은
심연의 존재가
‘선택’을 바꾸고 있다는 신호였다.

빛과 그림자의 감정이
서로 연결되는 순간
그 존재는 새로운 목표를 잡았다.

그 존재는
둘을 하나로 삼키려 하고 있었다.

유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리테는 눈을 크게 떴다.

리세가 절규했다.

안 돼
둘을 연결시키면
저 존재가
둘 다 삼킬 수 있어
둘을 연결시키면 안 돼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사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지금 이 둘이 연결되는 과정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그 말은
심연의 존재를
처음으로 흔들리게 만들었다.

리세는 충격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연결되면
심연은 둘을 먹을 수 있다고 했잖아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둘이 하나가 되면
먹을 수 있어
하지만
둘이 완전히 합쳐지기 전에
‘감정의 흐름’을 만들면
심연의 규칙이 깨져

유라와 리테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감정의 흐름
규칙의 파괴
그것이 유일한 탈출구

리세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건데
나도
너희와 연결되어 있는데

사내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심연이
너부터 먹으려는 거야

리세는 눈을 감았다.

그 말은…
그 말은 너무도 명확했다.

심연은
리세라는 ‘원본 감정’을 삼키기 위해 존재했고
유라와 리테는
그 원본의 조각이었다.

그리고
리세가 사라지면
유라와 리테도 사라진다.

유라는 손을 꽉 쥐고 말했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야

리테는 떨리는 눈으로 유라를 바라봤다.

하나로…
하나로 돌아가는 것…?

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다시 하나로 돌아가야 해
우리 스스로 선택해서
심연에게 먹히기 전에

바로 그 순간
심연의 존재가
거대한 몸체를 뒤틀며
세 사람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세 감정이
드디어
‘하나의 결말’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