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22부 바다 절벽 아래의 은밀한 도시

심연극장이 거대한 몸부림을 치며 흔들리던 순간,
어둠이 찢어지듯 뒤틀렸다.
검은 실들이 공기를 갈라내며 폭발했지만
바닥 아래의 깊은 층에서는 또 다른 진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심연보다 더 아래,
빛도 닿지 않고 기억도 내려가지 않는 깊은 틈.

그 틈에서 바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람도 아닌데 바람처럼 들리고
누군가의 목소리도 아닌데
누군가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소리.

유라는 순간적으로 그 소리가
자신을 불렀다는 걸 느꼈다.
리테는 귀를 막았지만
막아도 들리는 소리였다.
마음 안에서 오는 소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분명히 말했다.

아래로
더 아래로
절벽 아래로 내려와

그 순간 심연극장의 바닥이
거대한 입처럼 벌어졌다.
빛도 없고
그림자만이 방향을 잡고 있는 그 아래로
세 사람의 발밑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사내가 외쳤다.

잡아
떨어지면 안 돼
저 아래는
돌아올 수 없어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유라의 손이
리테의 손을
본능적으로 붙잡았다.
빛과 그림자가 서로를 잡는 순간
두 감정의 경계가 잠시 사라졌다.

리세는 그 둘을 잡으려 뛰어들었고
결국 세 사람은
어둠 속으로 동시에 떨어져 내렸다.

검은 실들이 그들의 몸을 스쳐 지나가며
기억을 훑었지만
끝내 붙잡지는 못했다.
심연의 존재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몸을 뒤트는 흔들림만 일으켰다.

세 사람은
끝없이 추락했다.

낙하라고 느껴졌지만
몸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밀려 이동하는 느낌.
중력이 아니라
기억의 틈을 타고 흐르는 듯한 감각.

그리고 마침내
세 사람은
바닥 아닌 바닥
빛 아닌 빛이 있는 곳에 떨어졌다.

옅은 흰색 안개가 바닥을 감싸고 있었다.
주위는 고요했고
아무도 없었다.

그곳은
도시였다.

하지만
지상에서 본 어떤 도시와도 달랐다.

유라가 숨을 삼켰다.

여기가… 어디야…

리테는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시…?
이런 곳이
도대체 어떻게…

그들은 바다 절벽 아래 도시에 서 있었다.
형태는 도시였지만
건물들은 기울어져 있었고
유리창은 전부 깨져 있었고
거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곳에는
빛이 없었지만 보였다.
그림자가 없었지만 그림자가 느껴졌다.
사람이 없었지만
사람의 숨이 들릴 것만 같은 느낌.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이 있었다.

이 도시의 공기 속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미세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이름 자체가 공기가 된 것처럼
바람 속에 섞여 속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리세는 얼굴이 질렸다.

여기는…
여긴
기억을 먹힌 사람들이 떨어지는 곳이야

유라가 숨을 멎은 채 물었다.

기억을 먹힌… 사람들…?

리테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럼
여기 있는 건물들…
여기 있는 이 도시 전체는…

리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여긴 모두
먹힌 기억들의 잔해로 만들어진 도시야

사내는 땅에 떨어진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낮게 말했다.

심연의 존재에게 먹힌 기억들은
사라지는 게 아니야
이 도시로 떨어지지
형체를 잃은 기억들끼리 모여
이렇게 도시를 만든 거야

유라는 몸서리가 났다.
리테는 숨조차 제대로 못 쉬었다.

리세는 땅에 손을 대며 말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수백 명
수천 명의 기억이 섞여 만들어진 곳이야
가끔은
누군가의 감정이 그대로 남아있기도 해

그 말과 동시에
건물 하나에서 갑자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이 울음
그러나 실제 아이의 울음이 아니었다.
기억 속에서 죽어버린 아이의 울부짖음이
형체 없이 떠도는 소리.

유라는 두 팔로 몸을 감쌌다.

여기…
정말 사람이 살아 있었던 곳처럼 느껴져
하지만 사람은 없고
기억만 있어…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에는
다시 태어나지 못한 기억들만 있어
이름을 잃은 사람들
그림자를 잃은 감정들
그리고
너희 둘 같은
갈라진 존재의 잔해들

그때
도시의 중심부에서
또 다른 울림이 퍼져나왔다.

유라가 놀라 눈을 돌렸다.

지금… 들었어…?

리테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발소리 같았어

사내는 표정을 굳히며 몸을 세웠다.

누군가 있어
여기서
살아남은 기억이 있어

리세는 눈을 찢어지게 뜨며 말했다.

살아남은… 기억…?
여기서 기억이 ‘살아남는다’는 게 무슨 말이야

사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도시의 골목 사이로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발걸음은
한 사람의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흰 안개 사이로
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유라는 숨을 멎었다.
리테의 심장이 두 번 크게 뛰었다.

그 사람은
현실의 사람이 아니었다.
기억이 형체를 만든 존재였다.
그러나 너무나 선명했다.

흰 옷
흰 머리
흰 눈동자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기억의 끝자락처럼
깨끗한 절망이 걸어오고 있었다.

사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기억을 먹히지 않은 자
먹히기를 거부하고
도시로 떨어진 자
기억과 감정이 완전히 분리된 자

그 존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너희는
기억의 마지막 열쇠를
가지고 있다

유라와 리테는
숨조차 내쉴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아주 천천히
유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기억의 열쇠를 가진 자
그것은 바로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