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도시가 거대한 파동에 휩싸이듯 흔들리고 있었다.
심연의 존재는 이제 도시의 하늘 전체를 먹어치울 듯 내려앉았고,
검은 실들은 살아 있는 초목처럼 도시의 골목과 건물을 휘감으며
가까스로 남아 있던 기억의 잔해들을 찢어내고 있었다.
유라와 리테는 서로의 손을 꽉 잡은 채
떨리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방금 마주한 기억
그 기억 속에서 보았던 리세
그가 마지막까지 남기려 했던 희망과 그림자
그리고
그 감정들이 바로
유라와 리테 자신이었다는 사실
가슴을 찌르는 고통보다 더 큰
이름조차 없는 감정이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의 중심에는
단 한 존재가 있었다.
리세.
그는 숨을 몰아쉬며
두 사람 앞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오면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잃었는지
왜 둘을 만들었는지
모두 떠올려 버린 것이다.
그 고통은
심연의 존재가 기억을 먹는 것보다 더 잔인했다.
기억의 존재가 조용히 말했다.
기억은 돌아왔지만
그 대가가 시작되었다
기억을 되돌리는 것은
언제나 대가를 요구하지
그것은 인간도
기억도
감정도
예외는 없다
유라는 두려움에 떨며 외쳤다.
무슨 대가…
무슨 대가를 말하는 거야…?
기억의 존재는
주변의 흰 도시를 가리켰다.
이 도시를 보라
이것은 모두
대가를 지불하고 사라진 기억들이다
누군가의 선택이 만든 잔해지
너희 셋 중 하나가
마지막 대가를 치르게 된다면
그 역시 이 도시가 될 것이다
리테는 숨을 멈추며 말했다.
마지막 대가…
그것은
우리 셋 중 하나가 사라진다는 뜻이야…?
기억의 존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곧 대답이었다.
심연의 존재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도시의 하늘은 완전히 찢어졌고
어둠은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세 사람을 향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검은 실들이
유라의 어깨
리테의 손끝
그리고 리세의 그림자에 닿았다.
그 실들은
그들을 끌어당기려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기다리려는 듯
멈추고 있었다.
유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왜 우리에게 선택을 시키는 거지…?
왜 이 도시는
왜 이 존재는
계속해서 선택을 요구하는 거야…?
기억의 존재가 대답했다.
심연의 존재는
감정을 먹는 존재다
그러나
감정은
스스로 선택될 때
가장 맛이 좋다
유라는 몸서리를 쳤다.
감정이…
음식처럼…
리테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선택하지 않으면
저 존재는 아무것도 못하는 거야?
기억의 존재는 고개를 저었다.
선택하지 않으면
셋 모두 사라진다
선택하면
두 개의 감정이 살아남고
하나는 대가로 사라진다
유라는 숨을 들이켰다.
그 말은 너무나 단순하면서
너무나 잔인했다.
리세는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걸음은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단단했다.
나야
대가는
내가 치러야 해
유라와 리테는 동시에 외쳤다.
안 돼
그럴 수 없어
리세는 고개를 저었다.
너희 둘은
내 감정이야
빛과 그림자
내가 잃어버린 것들
내가 버리고 싶었지만
버릴 수 없었던 것들
너희가 합쳐지면
너희는
완전한 기억이 되어
살아남을 수 있어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유라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넌…
넌 어떻게 되는 건데…?
리테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모두 너로 시작했어
우리가 하나가 되면
너는 사라져
그걸 알고 있잖아
리세는 미소를 지었다.
슬픈 미소였지만
그 미소에는 한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기억은
나로 시작하지 않아
기억은
너희 둘로 다시 시작해
유라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안 돼
그건 희생이야
너 하나를 바꾸기 위해
우리를 만든 게 아니잖아
우리를 살리고 싶어서
기억을 나눠 준 거였잖아
그런데
또 너만 사라지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리테 역시 손을 떨며 말했다.
난 안 받아들일 거야
너를 대신해서 살아남는 건
그건
살아남는 게 아니야
그건…
다시 죽는 거야
그때
기억의 존재가
천천히 손을 들어 둘 사이의 공간을 가리켰다.
아직
너희는
진짜 길을 보지 못했다
유라와 리테는 동시에 돌아보았다.
기억의 존재는 이어 말했다.
둘이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은
누구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둘은
본래 하나였던 감정
합쳐지면
그 감정은
리세를 넘어선 존재가 된다
리세는 숨을 멈추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기억의 존재가 말했다.
둘이 하나로 합쳐지면
너희는
리세가 아닌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기억의 주인도
감정의 주인도
이름의 주인도
모두 바뀌지
심연은
더 이상 너희를 먹을 수 없어
유라와 리테의 눈이 흔들렸다.
둘이 합쳐지면
누구도 대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
리세만 사라지는 것도
둘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말
진짜 길은
셋이 모두 살아남는 길이라는 말이었다.
기억의 존재는 조용히 덧붙였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유라와 리테는 숨을 삼켰다.
리세도 숨을 멈추었다.
기억의 존재는 천천히 말했다.
둘이 하나가 되려면
리세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두 사람에게 넘겨야 한다
빛과 그림자 모두
그가 품고 있던
마지막 심장까지
모두 넘겨야 한다
리세는 눈을 크게 뜨며 뒷걸음질쳤다.
그건…
내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는 뜻이잖아…
기억의 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흐르게 되는 것이다
너의 감정이
너의 기억이
너의 마음이
둘에게 흘러들어가
새로운 존재를 만들게 되지
유라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리테도 손을 떨며 눈을 감았다.
리세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그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난…
난 아직…
사라지고 싶지 않아…
그 말은 너무 솔직했기에
더 아팠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도시 전체가 흔들렸다.
심연의 존재가 더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실들이
세 사람을 동시에 덮치려 하고 있었다.
기억의 존재가 소리쳤다.
선택해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셋 모두 사라진다
유라가 리세에게 손을 뻗었다.
리세
너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흐르는 거야
우리 안으로
너의 마음이
너의 기억이
너의 이름이
우리가 되어
리테도 손을 뻗었다.
우리는 널 잃지 않아
너는 우리가 되고
우리는 네가 되는 거야
그게
하나가 되는 거야
리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고는
그의 눈에서
탄환보다 먼저
작은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는 두 사람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세 사람 사이에서
거대한 빛의 파동이 폭발했다.
도시가 찢어졌다.
심연의 존재가 뒤로 밀려났다.
검은 실들이 끊어졌다.
그리고
세 사람의 감정이
처음으로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