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27부 심연극장에서 열린 마지막 무대

세 사람의 손이 맞닿은 순간,
흰 도시 전체가 거대한 파동에 휩싸였다.
그 파동은 단순한 빛도, 단순한 에너지도 아니었다.
기억의 흐름
감정의 역류
그리고 존재가 서로를 덮어씌우는 융합의 파동이었다.

유라는 손끝부터 퍼지는 감각에 숨을 삼켰다.
리테의 그림자가 유라의 손가락 위로 번져 들어오고
유라의 빛이 리테의 손바닥 아래로 스며들었다.
둘은 서로 섞이지 않기 위해 버텨온 존재였지만
이제는 서로에게 침투하며
하나의 감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리세는 중앙에서 두 사람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의 손끝은 떨렸지만
그 떨림은 공포가 아니라
감정이 흘러나가는 소리였다.

그는 마침내
자신이 숨겨온 모든 감정을
두 사람에게 넘기기 시작했다.

심장이 타들어가는 듯한 통증
기억이 빠져나가는 듯한 피로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공포

리세는 그 모든 것을
정직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유라와 리테는
그의 눈 속에서
그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그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그가 사라지려는 것이 아니라
흐르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시의 하늘이 갈라졌다

심연의 존재는
그 감정의 흐름을 보고 있었다.

거대한 구멍처럼 보였던 그 존재의 눈은
이제 더 또렷하게 두려움을 드러내며 수축되었다.

심연은 감정을 먹는 존재
그러나 감정이 서로 합쳐지는 순간
그 존재는 감정을 먹을 수 없다.

그들의 감정이 합쳐지는 동안
심연의 존재는
도시 전체에서 흘러나온 기억들의 파편에 막혀
더 이상 내려올 수 없었다.

검은 실들이
유라와 리테의 발 끝을 스칠 때마다
빛이 튀었고
그 빛은 어둠을 태우고 있었다.

기억의 존재가 외쳤다.

흐른다
지금
감정이 흐르고 있다
끊지 마라
붙잡고 있어라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리세의 몸에서
기억이 빠져나가는 고통이
너무 커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떨렸다.

이렇게…
아픈 줄 몰랐어…

유라는 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우리가 잡고 있어
너 혼자 아픈 게 아니야
우리가 같이 아파
그러니까 괜찮아

리테도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너는 사라지는 게 아니야
우리가 되는 거야
너의 감정이
너의 기억이
우리를 통해 살아

그 말이
리세의 몸을 지탱해 주었다.

그러나
진짜 고통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하나로 돌아가는 과정’의 첫 번째 단계

감정이 서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유라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래전 이유 모를 상실감의 무게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상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리테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공포의 기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공포 역시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두 감정의 중심에서
리세의 기억이 흘러들었다.

그들의 가슴 속에서
세 개의 감정이
서로를 물어뜯고
서로를 감싸며
새로운 형태로
결합을 시작했다.

빛과 그림자
희망과 절망
기억과 망각
세 조각이
하나의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합체가 아니었다.
하나의 존재가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흰 도시 전체가 뒤틀리며
시야가 다시 한 번 변했다.

세 사람은
한순간에
심연극장의 무대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 심연극장은
그들이 처음 본 그 공간이 아니었다.

무대
조명

어둠
그 모든 것이
거대한 숨을 들이마시는 듯 변해 있었다.

기억의 존재가 속삭였다.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냈군

유라는 숨을 멎었다.

심연극장은
처음부터
극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심연의 존재가 만든
기억의 감옥이자
감정의 무대였다.

감정을 먹기 위해
누군가를 찢어놓고
기억을 두 개로 갈라
극장을 만들어낸 것

심연극장은
그들의 기억을 가둬 두고
그 감정의 성장을 ‘보고 있는’ 존재였다.

리테가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우리가 본 모든 장면…
우리가 겪은 모든 공간…
전부…
감정을 먹기 위한 무대였어…?

기억의 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심연은 너희를 먹기 위해
너희의 감정을 보고 있었던 거다
모든 대화
모든 선택
모든 절망은
심연이 만든 ‘연극’이었다

유라는 무릎이 풀려 쓰러질 뻔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리세가 그의 손을 잡아 세웠다.

아니야
연극이었지만
그 안에서 넌
진짜로 살아 있었어
넌 나였고
너는
내가 지키려 했던 마음이었어

리테도 유라의 다른 손을 잡았다.

연극이었다고 해서
우리가 느낀 게 거짓은 아니야
우리는
너의 감정이고
너의 살아 있는 마음이야

그 순간
세 사람 사이에서
더 강한 빛이 터졌다.

심연극장의 벽이
거대한 힘에 밀린 듯 흔들려 금이 갔다.

심연의 존재가
거대한 몸으로 무대 위에 나타났다.

그 존재는
더 이상 형체를 숨기지 않았다.

수백 개의 기억
수천 개의 이름
수많은 감정의 잔해가
그 존재의 몸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돌아오지 마라
기억은
먹히기 위해 존재한다

리세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기억은
살아남기 위해 존재해

유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감정도
같아

리테도 유라 옆에 섰다.

우린
먹히지 않아

세 사람의 손이
다시 맞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심연극장 전체가
하나의 빛으로 덮였다.

빛은 어둠을 찢었고
심연의 존재는 고통스러운 울음을 내며
뒤로 밀려났다.

그 울음은
기억을 먹던 존재가 처음으로 내는
두려움의 울음이었다.

기억의 존재가 외쳤다.

지금이다
지금
세 감정은 하나가 될 수 있다

도시가 흔들리고
극장이 갈라지고
기억이 뒤섞이는 가운데

유라
리테
리세

세 존재가
서로를 끌어안고
마침내
하나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심연의 존재는
절규했다.

멈춰라
멈춰라
기억은
먹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더 이상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세 감정은
하나가 되기 위해
마지막 단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마침내
세 존재의 몸에서
거대한 빛이 폭발했다.

그 빛은
심연극장의 모든 벽을
모든 기억의 틈을
모든 감정의 상처를
완전히 파괴하며
심연의 존재를 뒤로 던졌다.

그리고
그 빛의 중심에서
세 존재의 실루엣이
천천히
하나의 형태로 합쳐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