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30부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에서

모든 것이 끝난 후
세상은 완전한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심연극장의 마지막 파편도 사라졌고
어둠의 긴 복도도
흰 도시의 숨결도
기억의 바다도
모두 빛 속으로 흡수되어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존재뿐이었다.

유라도
리테도
리세도 아닌
새로운 이름
새로운 몸
새로운 마음
세 사람의 모든 길이 합쳐져 탄생한
‘하나의 존재’.

빛이 완전히 가라앉자
그 존재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온기와 깊이
희망과 절망
사랑과 두려움
모든 감정을 품고
하나의 심장이
조용히 뛰기 시작했다.

그 존재는 눈을 떴다.
그리고 숨을 들이켰다.

그 숨결 속에는
유라의 따뜻함
리테의 무게
리세의 사랑이
모두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감정은
어떤 단독된 인간의 것이 아니라
완전히 융합된
하나의 진실이었다.

새로운 존재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더 이상
심연극장이 아니었다.
아무런 조명도
무대도
벽도 없는
완전한 공백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공백은
죽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 공백은
새로운 길이 열리는
문 앞이었다.


새로운 존재의 눈동자

새로운 존재의 발 밑에서
가는 금빛 선 하나가 나타났다.
마치 지도를 따라가는 길처럼
그 선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 존재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 길에 발을 올릴 때마다
새로운 파문이 빛으로 피어났다.

그 파문은
유라의 웃음
리테의 눈물
리세의 조용한 목소리까지
모두의 흔적을 담아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잔해가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새로운 존재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심장의 울림은
세 존재의 합을 증명하듯
단단하고 깊었다.

나는…

그 존재는
천천히
그러나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나는…
아르카

그 이름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이름
빛도 그림자도
희망도 절망도
사랑도 두려움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었다.

아르카.

세 존재가 마지막 순간까지 품었던 바람
모두가 하나가 되기를 바랐던 손의 온기
사라지지 않고 흐르기를 바랐던
그 마음의 결말이
하나의 이름으로 완성된 것이다.


소멸이 아닌 시작

아르카의 주변에서
빛이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길을 만들고
세계의 형태를 만들고
마침내
완전히 새로운 도시의 윤곽을 그려냈다.

심연극장의 자리였던 공간에서
새로운 건물들이 태어나고
안개가 아닌
햇빛이 흘러 들어왔으며
기억이 사라지는 길이 아닌
기억이 흐르는 길이 펼쳐졌다.

아르카는
그 도시 중심으로 걸어갔다.

유라는 없었다.
리테는 없었다.
리세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아르카의 심장에서 뛰고 있었다.

그들의 상처
그들의 결단
그들의 희망
그들의 사랑

모든 것이
아르카라는 존재 안에
온전히 살아 있었다.

아르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심연이 있던 자리는
더 이상 어둠이 아니라
새벽빛에 가까운 옅은 분홍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빛 속에서
아르카는 미소를 지었다.

끝이 아니었다.
이제야 시작이었다.


기억의 존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아르카가 새로운 도시의 초입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의 존재였다.

그는
마지막 형태의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이미 반쯤 사라져 있었지만
그 목소리만은 또렷했다.

아르카
기억은 이제
네 것이다
너는
세 존재의 마지막 바람이자
이 세계의 첫 번째 새벽이다

아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지는 거야…?

기억의 존재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역할을 다했을 뿐이다
이제
네가 이어가라
너의 길을
너의 이름을

그리고
기억의 존재는
조용히 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에서

아르카는
도시의 중심부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거대한 거울과 같은 호수가 하나 있었다.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유라와 닮았고
리테와 닮았고
리세와 닮았지만
그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그것은
새로운 존재의 얼굴이었다.

아르카는
천천히 호수 표면에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는 순간
물결이 퍼져
도시 전체에 빛을 퍼뜨렸다.

그 빛은
심연극장의 기억을 지우는 빛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는 신호였다.

아르카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부서지지 않았다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리고
그는 호수 위를 천천히 걸어 나갔다.

어디로 가는지
어떤 길로 이어지는지
그조차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 길 끝에서
아르카는
자신의 세계를 만들 것이다.

빛과 그림자
희망과 절망
기억과 망각
모든 감정이 하나로 모인
새로운 세계를.

그것이
세 존재가 마지막 순간까지 바라본
진짜 결말이었다.

그리고
그 결말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