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마을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오후 다섯 시쯤이었다
바닷가 근처라 그런지 이 동네는 유난히 비가 자주 내렸다
그리고 비가 오면 어김없이 골목 아래 분식집 간판에 노란 불이 켜졌다
가게 이름은 빛바랜 페인트로 적힌 미정분식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근처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이 동네에 오래 살았던 주민들에겐 익숙한 장소였다
한서이는 회사에서 퇴근하자마자 자동으로 우산을 펴고 골목을 내려갔다
언덕 꼭대기에서 아래까지 이어지는 좁은 계단은
평소에도 발을 헛디디기 쉬운 구조였는데
비가 오면 더 미끄러워져서 한 계단 한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야 했다
비가 오면 늘 생각났다
남편과 신혼일 때는 비 오는 날마다 함께 라면을 끓여 먹었다는 사실
계단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
비가 처마에 떨어지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작은 집 안에 함께 울려 퍼졌던 순간들
그러나 세월은 그 순간들을 차갑게 식혀버렸다
지금 그녀의 집은 너무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무서울 정도였다
서이는 우산을 접어 가게 문을 살짝 밀고 들어갔다
김이 서린 유리창 안에는 테이블 몇 개
낡은 의자
그리고 가게를 지키는 주인아주머니가 있었다
아주머니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며 서이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곳에 이사 온 첫 주부터
서이는 비 오는 날마다 이곳에 들러 김밥과 어묵을 포장해 갔기 때문이었다
어묵 국물 한 컵 드릴까
아주머니의 말에
서이는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따뜻한 종이컵이 손에 닿자
그녀는 거기서 오는 열기를 잠시 느끼며
몸에 밴 습기가 조금은 사라지는 듯한 위안을 받았다
그때
가게 문이 다시 열렸다
문 위에 달린 작은 방울이 아주 작은 소리를 냈다
비에 젖은 신발 밑창이 바닥을 스쳤고
우산을 털며 들어온 사람은
서이가 오전에 계단에서 잠시 대화를 나눴던 옆집 남자
장우진이었다
그는 서이를 보자마자 눈을 잠시 크게 떴다
그러나 곧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서이 역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그 짧은 장면만으로도
서로가 이미 골목 이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진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라면 하나요
라고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그 말투는 건조했지만
라면을 고르는 그의 눈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가게에 익숙한 사람처럼 편안함이 묻어 있었다
이곳은 회사에서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들르는 곳이었던 것이다
서이는 어묵 국물을 마시며
그가 주문한 라면 냄새가 퍼져오는 것을 느꼈다
잔잔한 국물 끓는 소리
빗소리
그리고 그 사이에 흐르는 작은 라디오 음악
그 모든 소리가 자연스레 서로에게 스며드는 듯했다
평소라면 서이는 식당에서 누군가 옆에 있으면
그냥 김밥만 들고 서둘러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몸이 특별히 피곤했고
비도 많았고
집에 가도 반겨주는 사람도 없어
잠시 앉아 있어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우진은 라면이 나오자
조용히 젓가락을 들었다
그는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서이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이 있는 쪽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자세히 바라보지는 않지만
완전히 시선을 피하지도 않는
적당한 거리감
적당한 예의
그러나 묘하게 닿아 있는 공기
아주머니가 김밥을 썰며 말을 꺼냈다
둘이 오늘 이사 왔다지
인천에 살다 보면 다 아는 법이야
옆집끼리 사이 좋게 지내봐
서이는 당황하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고
우진은 젓가락을 들고 있는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웃음인지 긴장인지 알 수 없는 기색이 스쳐 갔다
라면을 몇 숟가락 떠먹은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여기 자주 오시나 봅니다
서이는 순간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했다
네 비 오는 날엔 여기보다 나은 데가 없어서요
우진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말에 수긍한다는 듯이
그리고 말없이 라면을 더 먹었다
대화는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은 대화가 훨씬 많았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사람만이 아는 눈빛
비오는 저녁에 일찍 가기 싫은 사람만이 아는 손끝의 망설임
서로의 침묵 속에
서로의 마음이 흘러들어가는 기묘한 감각
라면 한 그릇을 다 비운 우진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먼저 나갔다
문이 열리고
방울이 또 작은 소리를 냈다
비 냄새가 방 안을 스쳤다
그리고 우진은 우산을 쓰고 천천히 골목을 따라 올라갔다
서이는 그가 언덕 위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어 창문을 흔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이 작은 분식집의 따뜻한 불빛 속에서
자신의 삶에 아주 작은 균열이 하나 생겼다는 것을
별 의미 없는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이웃끼리 분식집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라고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남편이 없는 날들이 너무 길어지면서
자신이 무언가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음을
그 흔들림은 위태로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부정할 수도 없을 만큼 분명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서이는
문을 닫고 가방을 내려놓으며
방금 전에 일어난 일들을 곱씹었다
분식집의 따뜻한 김
우진의 눈빛
오랜만에 느낀 누군가의 존재감
우진 역시
라면값을 계산하고 우산을 쓰며 골목을 오르면서
한서이의 조용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녀가 말하던 비 오는 날엔 여기보다 나은 데가 없다는 말
그 말은 단순한 식당 평가가 아니었다
바쁘지 않은 시간
누군가와 잠시 떠오르는 대화
자신도 모르게 그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마음
그 모든 것이 그 말 안에 있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골목의 가로등이 젖은 계단을 비추고
조용한 집들 사이에서
두 사람의 불 꺼진 창문만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날의 짧은 만남은
아무도 모르게
두 사람의 삶에서 중요한 시작이 되었다
결혼이라는 경계
타인의 시선이라는 울타리
버텨내는 일상이라는 습관
그 모든 것들이 여전히 그들을 묶고 있었지만
작은 균열은 이미 생겼다
그리고 균열은
늘 조용한 곳에서 시작된다
그날 밤의 분식집
그 짧은 만남
그 작은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언덕 위 이야기의 두 번째 장을 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