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계절의 경계를 지우는 방식으로 내렸다
여름이 다가오는 길목에서 내리는 비는 단순히 땅을 적셔놓는 수준이 아니라
세월과 기억을 덮어버리는 듯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언덕마을은 그 비가 올 때마다 숨을 고르는 것처럼 고요해졌다
이곳에 살아본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비 오는 날 언덕골목의 소리는 묘하게 사람 마음을 흔든다고
발자국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계단을 내려가는 물소리가 오래 머무른다
그리고
그날 그 시간에 만나지 않던 사람들이 우연히 비 아래에서 다시 마주치게 된다
서이는 퇴근 후 우산을 쓰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비가 점점 더 굵어져 골목의 골격을 무너뜨리듯 퍼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상하게 비를 피해 뛰지도 않고
그저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김밥과 어묵을 포장해 가는 건 습관이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분식집에 들르기 전부터
가슴이 조금 더 빠르게 뛰었다
골목 어귀를 지나
미정분식의 오래된 간판이 보일 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분식집 안에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누군가는
어쩌면 그날 밤 분식집에서 조용히 라면을 먹던
옆집 남자일 수 있다는 것을
서이는 문을 밀며 조용히 들어갔다
가게 안은 비 때문인지 김으로 흐려져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손님이 많지 않아
TV 앞에 앉아 클래식 드라마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그 틈으로 서이는 가게 가장 안쪽 창가 자리에서
라면 그릇 앞에 앉아 조용히 김을 마시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장우진
그는 서이를 보자
아주 잠시
정말 그 순간만큼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습관처럼 가볍게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이는 물티슈로 손을 문지르며
가게 안쪽 다른 테이블에 조용히 앉았다
일부러 떨어진 자리
그러나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은 거리
주문을 하러 다가온 아주머니가 말했다
오늘도 김밥이야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김밥이 나오고
어묵 국물도 따라 나왔다
서이는 김밥을 한 조각 집어 먹으면서
우진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는 젓가락으로 국물을 휘저으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순간에
눈을 들었다
그 방향은 서이가 있는 곳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 짧은 마주침
그 한 번의 교차는
두 사람 모두에게 오래 남았다
비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렸다
금속 지붕으로 떨어지는 비
발자국이 사라지는 듯한 물 흐르는 소리
가게 안의 김
그리고 말하지 않는 목소리들
서이는 김밥을 먹는 속도를 늦추었다
오늘은 집으로 일찍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집에 들어가면 조용한 벽과 냉장고 소리만 들릴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꾸만 의미 없는 생각들만 늘어갔다
오늘 남편은 베트남으로 떠났다
전화는 오지 않았다
출장 일정이 길어지고 있다는 말만 남기고
무언가 설명은 늘 부족했다
어느 순간부터 민석의 말은
서이가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된다는
조용한 경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서이는 그 경계를 넘고 싶지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우진은 이곳에서 매일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이면 꼭 나타나는 사람이었다
라디오 야간 편성을 맡는 그는
방송국 근무가 늦어지는 날이면 이곳에서 라면 한 그릇을 먹고
마음을 조금 비워가는 습관이 있었다
서이는 우진이 그런 사람인 것을
그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말
누군가 대신 걱정하는 마음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법은 잘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의 표정이었다
몇 분 뒤
우진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가 계산을 마치고 우산을 펴기 위해 문을 열었다
바로 그때
그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서이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서이는 당황해 시선을 돌렸지만
우진은 잠시 do어색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가 많이 오네요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그 말은 이웃으로서 건네는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깊게 스며들었다
서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라디오 잘 듣고 있어요
밤 프로그램
목소리 알아듣겠더라고요
우진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나 곧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아
들으셨군요
밤마다 떠드는 게 제 일이라서요
그는 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비가 그의 우산 위로 떨어져 잔잔한 소리를 냈다
서이는 어두운 창가를 뒤로하고 앉아 있었다
무엇을 더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입술은 저절로 움직였다
라디오에서 말하는 것보다
오늘이 더 조용하네요
우진은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듯
짧게 숨을 고르고 말했다
여긴 동네라서요
말을 줄여야 하거든요
그 말은 농담 같은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묘하게 쓸쓸한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잠시 둘 사이에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가게 밖의 비는 더욱 세지고
창문은 김으로 완전히 가려졌다
우진은 끝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인사한 뒤 언덕 위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그의 검은 우산이 골목 곡선을 따라 멀어져 갈수록
서이의 가슴은 묘하게 가벼워지면서도
어딘가 허전했다
그날 밤
서이는 분식집을 나서며 비를 맞았다
우산을 펴지 않은 채 잠시 비를 맞았다
얼굴에 닿는 빗방울이 식었지만
마음속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은
비 때문에 더 깊고
더 조용해졌다
그 골목 위에서
서이는 자신도 모르게 느껴지는 감정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감정은
연민인지
동질감인지
혹은
더 위험한 감정인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냥
두 사람이 비 오는 날마다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이
그녀의 머릿속에 잔잔한 파문처럼 남아 있었다
그리고 서이는 그날 처음
작은 두려움을 느꼈다
이렇게 비 오는 날마다 마주친다면
서로에게 조금씩 젖어드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저녁의 어둠 속에서
비는 멈추지 않았고
언덕 위 두 집의 창문만이
서로가 있다는 사실을
아주 미약하지만
확실하게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