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멈춘 듯하다가도 다시 내렸다
언덕마을의 하늘은 어느 순간부터 우산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계절에 들어섰다
시멘트 벽에 그대로 배어드는 비 냄새
빗물이 고여 반짝이는 계단
가끔 누군가의 신발이 미끄러지며 좁은 골목에 작은 파문을 만들고
그 파문 속에서 사람들은 조용히 자신의 일상을 이어나갔다
서이는 어느 날
퇴근 후 집 안 작은 화장대 앞에 앉아 스카프를 펼쳐보았다
초록빛이 은은하게 퍼지는 얇은 소재의 스카프
남편 민석이 출장 다녀오며 선물했다고 했던 바로 그 스카프였다
색 자체는 예뻤지만
어쩐지 오래전부터 이 스카프를 볼 때마다
서이는 기분이 알 수 없게 뒤틀렸다
왜냐하면
민석이 이 스카프를 사온 그 날
그는 너무 큰 미안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그것을 건넸기 때문이다
그 날이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하기 어려웠지만
그 감정이 함께 배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스카프 끝을 손끝으로 굴리며
서이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이 스카프를 흔들었고
그 흐름 속에서
서이는 문득 며칠 전 언덕 포구에서 만난 우진을 떠올렸다
그의 말투
그의 숨소리
비가 그치지 않는 골목에서 나누었던 조용한 고백 같은 말들
그 모든 것이 마치 그 초록 스카프와 겹쳐졌다
그녀는 스카프를 조심스레 접었다
접힌 천은 이상하게도 손에 닿는 온도가 차가웠다
한편
같은 시각
옆집 장우진은 책상 앞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밤 라디오 원고를 쓸 시간인데
손이 펜 위로 움직이지 않았다
책상 모서리에는 파란색 만년필이 있었다
심플한 디자인
은색 클립
딱 보자마자 선물 받은 것이 한 눈에 보이는 깔끔한 모델이었다
파란 만년필
그것은 아내 지현이 몇 달 전
갑자기 우진에게 건넸던 선물이었다
라디오 대본 쓸 때 쓰라고
필기감이 좋은 거래
그녀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진은 알고 있었다
이 선물을 건넬 때
그녀의 얼굴에서 따뜻한 감정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마치 누군가에게서 받은 물건을 그대로 전달하는 듯한
피곤과 형식만 남아 있었던 그 표정
그러나 그 이상을 묻는 것은
어쩐지 겁이 났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만년필을 받아들었다
오늘
그 파란 만년필이 그의 책상 위에서 빛을 받으며 조용히 놓여 있었다
그는 펜을 집어 들고
종이 위에 무언가를 쓰려고 했지만
손끝이 자꾸만 떨렸다
만년필은
아내의 냉랭해진 마음의 형태처럼 느껴졌다
그는 종이를 버리고 다시 새 종이를 꺼냈다
그러나 이번에도
손끝은 움직이지 않았다
왜인지
며칠 전
분식집에서 만난 서이가 떠올랐다
비 오는 날
김이 서린 창가 옆에서
서이가 조용히 웃던 순간
그 순간은
지현과 결혼한 이후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우진은 펜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숨이 막히는 듯했다
자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감정을
멈출 수 없었다
며칠 뒤
우진은 서이가 살고 있는 집을 지나
분식집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에
우연히
서이가 가방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손에서
초록 스카프가 빠져나오며 살짝 바람에 흔들렸다
그 초록빛
그 결
그 무늬
우진은 그 스카프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스카프는
어디선가
아주 익숙했다
지현의 옷장 속에서 본 적 있었다
출장 다녀왔다는 말과 함께
새로운 물건들이 몇 개 나열되어 있던 날
그 중 하나가
분명
비슷한 초록색 스카프였다
우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번쩍 지나가는 가능성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는 서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요즘 비 때문에 길이 미끄럽죠
서이는 스카프를 정리하며 가볍게 웃었다
그러게요
오늘도 비라네요
그들은 잠시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우진의 눈은 계속
서이가 들고 있는 그 초록 스카프에 머물러 있었다
왜인지
그것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서이도 우진의 시선을 느낀 듯
스카프를 더 꽉 쥐었다
그리고 아주 잠시
서이는 말했다
이 스카프요
남편이 출장 갔다 오면서 사온 건데
색이 예쁘죠
우진은 미묘하게 표정을 숨겼다
입술은 웃었지만
눈동자는 흔들렸다
네
예뻐요
어딘가 낯익은 느낌도 들고요
그 말
그 말 하나가
둘 사이의 공기를 바꿨다
서이는
우진의 말 속에 숨어 있던 미세한 떨림을 읽었다
그 떨림이
누구 때문인지도
알 것 같았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느껴졌기 때문에
잠시의 침묵
그러나 그 침묵은
서이의 불안과
우진의 두려움
둘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스며드는 감정들이
서로에게 닿는 순간이었다
그날 밤
서이는 초록 스카프를 탁자 위에 펼쳐 놓고
그 안에 배어 있을지 모르는
남편의 흔적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흔적이
더는 믿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우진은 집으로 돌아와
파란 만년필을 다시 꺼냈다
그는 펜을 잡고
종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오늘도
글은 써지지 않았다
손끝이 무거웠고
머릿속은 더 무거웠다
두 색
두 증거
두 사람
초록 스카프
파란 만년필
그것은 마치
둘의 결혼이 어디서부터 금이 갔는지를
조용히 드러내는 징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둘은 알고 있었다
이 조용한 증거들이
앞으로 무엇을 끌어올릴지
두려운 마음으로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