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6부 예약 명단에서 본 두 사람의 이름

장우진은 그날도 야근을 마치고 늦은 시간에 방송국을 나섰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공기에는 습기가 묵직하게 남아 있었다
항구 도시 특유의 끈적한 바람은
사람의 몸뿐 아니라 마음마저 축축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버스를 타지 않고 언덕마을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어디론가 가버린 집중력
대본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활자들
아내가 새벽 근무라며 남긴 짧은 메모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여
그는 처음부터 걷는 것이 맞다는 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항구 근처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국제선 터미널로 가는 길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밤 늦은 터미널은 낮보다 더 조용한 법이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적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불빛들이 길게 번졌다
그리고 우진은
고개를 들고 터미널 입구를 바라보는 순간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유리문 근처 전광판에는
다음날 출항 예정인 선박들의 목록이 떠 있었다
싱가포르
하노이
홍콩
요코하마
도시 이름들은 한 줄씩 천천히 흘러가며
그 아래에 예약된 승객들의 명단 일부가 짧게 표시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지나가는 사람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우진의 시선이 그 전광판에 붙박이처럼 고정되었다

그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한 걸음 두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빛이 강한 화면에 눈이 시큰해지면서도
그는 계속 텍스트를 읽었다

그러다
그는 전광판을 바라보던 눈을 크게 떴다

오민석
류지현

두 이름이
같은 목적지
같은 선박
같은 시간대에
나란히 표시되어 있었다

그 순간
우진의 손에서 원고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종이가 흩어져 길바닥에 떨어졌지만
주워 담을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어딘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 소리는 터미널 바닥도
해안도로 금속 울타리도 아닌
자신의 어딘가에서 들린 소리였다

그는 전광판을 계속 바라봤다
혹시 오타일까
동명이인일까
허상일까

그러나 화면은 현실이었다
새로고침되어 다시 떠오른 명단에서도
두 사람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민석
서이의 남편
출장이 잦다던 남자
집에 머물지 않는 시간만큼 스카프와 선물들이 늘어가던 사람

류지현
자신의 아내
일 때문에 바쁘다며
새벽 출근과 야간 업무로 집을 비웠던 사람
가끔 이유 없는 피로를 핑계로
대화를 피하던 사람

두 사람의 이름이
한 줄에
나란히 있었다

우진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흔들리지 않는 시선 뒤에서
모든 감정이 끓어올라 터져내리고 있었다

분노
혼란
배신감
그리고
어딘가에서 이미 느끼고 있었던
얇고 차가운 인정

그는 화면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오민석
반대 손가락이
류지현
이름을 짚었다

그리고 작은 숨을 토하며
그 두 글자 사이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어쩌면 오래 전부터
마음속 어디선가
둘이 엮여 있다는 느낌을
그는 피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초록 스카프
파란 만년필
설명하지 못하는 선물
약해진 말투
비어가는 집

그 모든 조각이
터미널의 전광판 앞에서
한 번에 맞춰졌다

그는 바람을 들이마셨다
바람은 금속의 냄새가 섞여 거칠었고
몸 안 깊숙이 들어왔다
숨을 들이마신 뒤
그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한편
서이는 그 시각
집에서 스카프를 정리하고 있었다

남편은 오늘도 연락이 없었다
출장이 길어졌다는 문자를 보내기만 할 뿐
저녁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서이는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가
다시 풀었다
또 다시 둘렀다가
이번에는 의자 위에 던져버렸다

왜 이렇게 이 스카프가 기분을 거스르게 만드는지
서이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의 언저리에서
미세한 불안이 자꾸만 밀려왔다

그녀는 창밖을 보았다
언덕 아래 도로에
머리에 라디오 원고 가방을 든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우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늘 라디오 생방송이 끝나면 늦게 올 텐데
왠지 모르게
서이는 그가 오늘 골목을 걸어 올라오지 않을까
조용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왜 기다리는지
그 이유조차 말할 수 없었지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우진은 터미널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건물 주변의 불빛이 사방에서 번지고
바람은 쉬지 않고 얼굴을 스쳤다

그는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갑자기
서이가 떠올랐다

비를 피하던 계단 포구에서
조용히 미소를 짓던 모습
분식집 테이블에서 김밥을 먹으며
어딘가 외로워 보이던 눈빛
그 눈빛 속에는
말하지 못한 질문들이 숨어 있었다

그 질문들은
지금 이 순간
우진의 머릿속에서
또렷한 형태로 떠올랐다


왜 둘은 이렇게 멀어졌을까
왜 둘은 이렇게 다르게 흘러왔을까
왜 둘은
이렇게나 쉽게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 되었을까

눈을 조금 감았다가 뜬 우진은
천천히 몸을 돌려 도로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바람이 그의 재킷 아래로 들어와 몸을 차갑게 했다
그러나
그 차가움은
지금의 머릿속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서이가 사는 방향을 올려다봤다
그 집 창문은
언제나 그랬듯
조용히 불이 켜져 있었다

간판 불빛 아래
작은 옆집
문이 닫혀 있는 그 집은
이상할 정도로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그 집의 불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우진은 조금이나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서이는 창가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언덕 아래로부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검은 그림자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림자는 울퉁불퉁한 계단 사이에서 커졌다 작아졌다 했지만
걸음걸이는 알 수 있었다
장우진

서이는 자신의 가슴이
조용히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면서도
그의 모습이 언덕 끝에 나타나는 그 순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조금 더 다가갔다

우진이
얼굴을 들었다

창문 너머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얼마 전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으며 웃던 눈빛과 달랐다
오늘은
그의 눈빛이 더 깊었고
더 무겁고
더 흔들리고 있었다

서이는 그 눈을 보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그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를 말하듯
아무 말 없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언덕 너머 몇 미터
그러나 마음속의 거리는
갑자기 너무 가까워져 버렸다

초록 스카프
파란 만년필
그리고
예약 명단에서 마주한 두 사람의 이름

두 사람의 결혼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한 번에 부서져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