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골목에서 헤어진 후
우진은 집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등을 문에 기댄 채 깊은 숨을 내쉬었다
온종일 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듯했다
수십 번 심장이 멈출 것 같았고
수백 번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그러나 그 모든 혼란 속에서 이어지는 길은 단 하나였다
지금
무언가를 써야 한다는 것
그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책상 앞으로 걸어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파란 만년필을 손에 쥐었다
지현이 준 만년필
그러나 이제는
지현과는 아무 의미도 연결되지 않은 만년필
문득
서이가 창가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던 순간이 떠올랐다
둘의 눈빛 속에 담겨 있던 고요한 떨림
그 속에서
그는 단어를 찾았다
문장과 장면을 찾았다
이야기의 시작을 찾았다
책상 위에는
오랫동안 생각만 해오던 라디오 연속극의 빈 노트가 있었다
그는 만년필을 uncapped 상태로 들고
노트의 첫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고
첫 문장을 적었다
비가 그치지 않는 도시에서는
사람들의 마음도 쉽게 마르지 않는다
그 문장이 종이에 적히는 순간
우진은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이 문장이
오늘의 밤뿐 아니라
이 계절 전체를
자신의 삶 전체를 감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손이 가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계속 글을 적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외로움을 숨기고 살지만
때로는
그 외로움을 알아보는 사람이 곁에 나타나기도 한다
서이와 함께 계단 포구에 앉아 있었던 장면
그때의 공기
그때의 침묵
그 침묵 속에서 서로의 고통이 닿았을 때의 이상한 따뜻함
모든 것이 문장 위로 스며들었다
우진은 글을 쓰면서
자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야기의 형태를 빌렸지만
실은 서이를 향한 마음이었다
말할 수 없으니
글로 남기는 감정
그렇게라도 남기지 않으면
자신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종이 위에는 빼곡하게 글이 채워져 있었다
우진은 만년필을 내려놓으며
깊은 숨을 들이켰다
그는 처음으로
대본이라는 이름의 무언가를 완성했다
아직은 첫 회도 안 될 만큼 짧고
거칠고
정리가 덜 된 내용이었지만
이 대본은
그의 영혼이 직접 쓴 첫 번째 글이었다
누구를 위한 글도 아닌
누가 시켜서 쓰는 글도 아닌
그저
자신이 살기 위해 쓰는 글
그는 의자에 기대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은
창문 밖 하늘도
밤하늘의 별도 아니라
바로
서이였다
그녀가 보여준 그 고요한 슬픔
그리고 그 슬픔을 감추며 웃었던 그 순간
그녀는
그의 글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었다
우진은 문득
오늘 그녀에게 말한 마지막 문장을 떠올렸다
우리
비슷하죠
많이
그 말은
그저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건드린 사실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우진은 완성된 첫 번째 대본을
조심스레 접어 노트의 앞표지에 끼워 넣었다
다음 장을 펼쳐 다시 제목을 썼다
제 2장
비가 머무는 골목에서 만난 사람
그리고
그는 펜을 멈추었다
이 다음 이야기를
홀로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쓰는 순간에 알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장면은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만들어야 하고
그 누군가가
서이였다
그녀는 라디오 드라마를 좋아했고
상상력이 풍부했고
무엇보다도
그의 글을 가장 잘 이해해 줄 사람이었다
그는 만년필을 내려놓고 스탠드를 끄려다
손을 멈추었다
대본을 그녀에게 보여도 될까
라는 생각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지금
자신처럼 무너져 있는 사람이다
어쩌면 더 조심해야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만은 숨기고 싶지 않았다
우진은 천천히 웃었다
오늘처럼 무너진 날에
단 한 번
단 한 사람에게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우진은 퇴근 후
대본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언덕 아래 분식집에 잠시 들렀다
김밥을 주문한 뒤
창가에 앉아 비에 젖은 골목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늘 그렇듯 작은 방울 소리가 들렸다
서이가
분식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우진을 보았고
우진도 그녀를 보았다
어제의 어두운 감정들이 모두 사라진 듯
둘의 얼굴은 아직 조심스러운 불빛으로 서로를 맞았다
서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또… 왔네요 오늘도
우진은 대답 대신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접힌 대본
첫 번째 장면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
그는 종이를 그녀 앞에 조심스레 놓으며 말했다
이거
읽어줄 수 있나요
제가
어젯밤 쓴 첫 번째 대본이에요
서이는 놀란 듯 종이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잠시 흔들렸지만
곧 진지하게 변했다
천천히 접힌 종이를 펼치며
속삭이듯 말했다
읽어볼게요
그리고
두 사람은
같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이 밤
이 대본
그리고 이 순간은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서서히 다른 색으로 번져가기 시작한
첫 장면이었다
무너진 결혼에서
비틀린 마음에서
서로에게 조금씩 스며드는
아주 조용하고
아주 위험한 시작
그 시작은
이 작은 대본 한 장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