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진이 자신이 쓴 첫 번째 대본을 건네던 그날 밤
미정분식의 오래된 전등은 노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작은 방울이 달린 문은 계속 열렸다 닫히며 잔잔한 울림을 남겼고
서이는 가만히 그 대본을 손에 쥐고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는 가로등 아래 비가 다시 흩뿌리기 시작했고
분식집 바닥에는 젖은 빗물이 조금씩 묻어 들어오고 있었다
서이는 대본을 읽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본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우진 자신의 마음이 너무도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비가 오는 도시
지우지 못한 고독
누군가에게서 처음 느낀 위로
서이는 종이를 접은 뒤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녀는 알았다
이 이야기가 단순한 글이 아니라는 것을
이건 우진이
세상에 내놓기 힘든 자신의 마음을 담아낸 고백이었다
테이블 위의 종이컵에서 김이 서리고 있었다
서이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이 글…
계속 쓰고 싶어요
그 말에
우진은 놀란 듯 눈을 들었다
그는 그녀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대본을 보여준 일을 후회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먼저 손을 뻗어왔다
그 사실이
그는 숨이 멎을 만큼 놀라웠다
서이는 대본의 한 장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부분
이 도시를 움직이는 건 비가 아니라
외로움이라는 설정
좋아요
근데 조금 더
사람 냄새가 나도 좋을 것 같아요
저
라디오 드라마 많이 들었거든요
우진은 작게 웃었다
네
그런 느낌을 원했어요
근데
혼자 쓰니까
자꾸 막히더라고요
그러자 서이가 말했다
혼자 쓰지 말아요
같이 써요
저도
이야기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 말
그 순간
우진의 가슴은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같이 쓰죠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뭔데요
집에서 하면
누가 들을 수도 있잖아요
두 집 다
벽이 얇아서 소리 잘 새잖아요
그 말은
조심스럽고 신중한 제안이었다
둘은 이제 서로에게 너무 위험한 사람들이었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위험을 피하면서
이야기를 계속 써 내려갈 공간은 필요했다
그때
분식집 아주머니가
옆 테이블을 치우면서 슬쩍 말했다
작가님
그 위에 여인숙 아시죠
여기서 쭉 올라가면 나오는 개울골 여인숙
거기 3층 다락방은 요즘 사람도 거의 안 와요
조용해서 글쓰기 좋아
전에 다른 작가들도 거기서 대본 썼었어요
아주머니의 말이
둘 사이에 침묵을 남겼다
위험한 선택일 수 있음을
둘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왜인지 모르게
딱 맞는 장소처럼 느껴졌다
서이는 아주머니가 자리를 떠나자
우진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볼까요
내일 저녁에
우진은 대답하지 않은 채
서이가 들고 있는 대본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305호에서 만나요
다음 날
둘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각자 다른 길로 여인숙을 향했다
개울골 여인숙은
동네 꼭대기에 위치한 오래된 3층짜리 건물이었다
나무 계단은 조금씩 삐걱였고
복도는 비에 젖는 냄새가 스며들어 있었지만
누군가가 머물기엔 충분히 조용한 공간이었다
305호
문 앞에 서자
서이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우진은 이미 안쪽에 앉아 있었다
책상 하나
낡은 조명 스탠드 하나
그리고 두 개의 의자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공간
그러나
둘에게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안전한 장소처럼 느껴졌다
서이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여기
정말 조용하네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여기서 쓰는 글들은
다른 곳에서보다
조금 더
정직해진대요
그 말에
서이는
조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우리도 정직하게 써보죠
우리 이야기 말고
대본 이야기요
우진은
그 말 속에 담겨있는 경계의 무게를 알았다
그녀가 일부러 선을 긋고 있다는 것을
그 선이
두 사람 모두를 지켜주는 유일한 안전장치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그 선을 존중하기로 했다
둘은 대본을 펼쳤다
서이는 등장인물들의 설정부터 세심하게 고치기 시작했다
남자 주인공의 직업
여자 주인공의 취미
그들이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는지
비가 오는 도시에서 왜 서로를 만났는지
저녁 내내
둘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진지했고
몰입했고
감정이 깊었다
그 작은 공간에
두 사람의 대화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우진은
그녀의 의견 하나하나에 숨을 고르며 들었다
서이가 말하는 방식은
언제나 생각을 천천히 녹여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우진에게 그 말투는
어쩐지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힘이 있었다
서이는
우진이 대본을 다루는 방식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기울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집중하는 눈
그의 말투
그의 조심스러움
둘은 대본의 첫 장면을 함께 완성한 뒤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진이 먼저 말했다
서이씨
오늘
올라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말에
서이는 잠시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저도요
오늘
여기 오길 잘한 것 같아요
그 말은
상처를 끌어안고 버텨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창밖에서는
밤새 내내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 속에서
305호는
두 사람이 처음으로
서로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공간이 되었다
대본을 함께 쓰는 일은
그들의 결혼이 무너지는 소리를 잠시 잊게 했고
상처를 덮는 잠깐의 온기가 되었다
그리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채
이 작은 다락방
305호에서
조용한 사랑의 불씨가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발화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