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호 다락방의 밤공기는 낮보다 더 조용했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바람은 오래된 커튼을 살짝 흔들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바람에는 항구의 냄새와 젖은 나무 냄새가 섞여 있었고
그 냄새는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집중을 깊게 만들었다
서이는 책상 위에 대본을 펼쳐 두고
연필로 여백에 작은 메모를 남기고 있었다
우진은 그 옆에서 만년필을 쥔 채
그녀가 말하는 내용을 조용히 받아 적었다
여기서
여자 주인공이 그냥 돌아서지 말고
잠깐 멈춰 서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비 오는 골목을 바라보는 장면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하지 않는 장면이군요
라디오로 들리면
더 많은 걸 상상하게 될 것 같네요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 속 인물들에게
자신들이 하지 못한 말들을 대신 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05호에 모이는 시간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저녁의 일부가 되었다
누가 먼저 연락하지 않아도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로
같은 발걸음으로 오게 되었다
서이는 퇴근 후 집에 들러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거울을 바라본 뒤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문을 나섰다
우진 역시 방송국에서 나와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언덕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서로에게 가는 길이
이제는 너무 자연스러워졌다는 사실을
굳이 말로 확인하지 않았다
대본은 점점 길어졌고
등장인물들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남자 주인공은
밤마다 라디오를 통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신 말해주는 인물이 되었고
여자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말하지 못한 채
항상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서이는 그 설정을 적어 내려가다가
잠시 손을 멈추었다
이 여자
조금 바보 같지 않아요
우진은 고개를 들었다
왜요
자기 마음은 숨기고
남의 마음만 들여다보잖아요
그러다 결국
자기 마음이 뭔지도
잊어버리게 될 것 같아서요
그 말은
이야기 속 인물을 향한 말이었지만
우진은 그 안에 담긴 진짜 뜻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그런 사람이 있어야
이야기가 움직이죠
누군가는
끝까지 참아야 하니까
서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쪽이 묘하게 아려왔다
어느 날 저녁
305호에서 대본을 쓰던 중
갑자기 아래층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여인숙 주인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였다
서이는 순간 몸을 굳혔다
우진 역시
말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다행히 발소리는 2층에서 멈췄고
곧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그 짧은 순간
서이는 깨달았다
자신들이 얼마나 위태로운 선 위에 서 있는지
그리고
그 선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서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너무 자주 만나고 있는 것 같아요
우진은 대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부정도
동의도 아닌
생각의 시간이었다
그는 결국 말했다
그렇죠
그래서
여기서만 만나는 거잖아요
다른 데서는
절대 안 보고
그 말은
약속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서로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에 가까웠다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만
305호에서만
이야기를 쓰는 동안만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 규칙을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선
말하지 않는 약속
그러나
규칙이 생길수록
그 규칙을 의식하게 되었고
의식할수록
더 위태로워졌다
그날 밤
대본의 한 장면을 함께 읽다가
서이는 문득
자기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장면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서는 이유가
좀 더 분명했으면 좋겠어요
우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이유가
뭘 것 같아요
서이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을 다물고
손가락을 꼭 쥐었다
그러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가진 걸
모두 잃을까 봐요
그 말은
이야기를 위한 말이 아니었다
서이 자신의 말이었다
우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조여 왔다
그 역시
같은 두려움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그럼
그 장면
아직은
말하지 않는 걸로 두죠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위로인지
미루기인지
둘 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날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305호의 불은
언제나 밤늦게까지 켜져 있었다
그러나
그 불빛 아래에서
두 사람은
가장 중요한 이야기만은
끝내 꺼내지 않았다
그들이 쓰는 이야기는
점점 솔직해졌지만
그들이 숨긴 이야기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리고
그 무게는
언젠가
반드시 말을 하게 만들 것임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305호를 나서며
서이는 계단에서 잠시 멈춰 섰다
뒤돌아보면
우진이 있을 것 같았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는 순간
무언가가
되돌릴 수 없게 변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이야기를 쓰면서도
각자의 진짜 이야기는
끝내 숨긴 채
밤을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