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2부 선을 긋는 연습 마음은 자꾸 번진다

305호로 올라가는 계단은 여전히 삐걱거렸다
나무가 오래되어서 나는 소리였지만
서이는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의 마음이 내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날은 비가 오지 않았다
비가 오지 않는 밤은
오히려 더 조용해서
생각이 또렷해지는 법이었다
서이는 그런 밤이
조금 두려웠다

305호 문 앞에 서서
잠시 손잡이를 잡은 채 멈췄다
오늘은
조금만 이야기하고
조금만 쓰고
일찍 내려가자고
스스로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문을 열자
우진은 이미 와 있었다
책상 위에는 대본이 펼쳐져 있었고
파란 만년필이 종이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이가 먼저 말했다
우진은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좀 일찍 왔네요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에서 일이 빨리 끝나서요

그 말은 사실이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오늘따라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 더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서이는 인정하지 않으려 애썼다

둘은 대본을 다시 펼쳤다
이야기는 중반부로 접어들고 있었고
등장인물들은 점점 더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어 있었다

서이는 대본을 읽다가
연필을 내려놓았다

이제
이 둘이 너무 가까워진 것 같아요

우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래요


이렇게 계속 가면
청취자들이
이 둘이 결국 넘어갈 거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그 말 속에는
이야기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우진은 잠시 생각한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여기서
선을 하나 긋죠

선을 긋는다는 말은
이야기 속 인물들에게도
그리고
자기 자신들에게도
동시에 필요한 말이었다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 둘은
절대
그 선을 넘지 않기로 약속하는 거예요

우진은 대본 위에
굵은 선을 하나 그었다
그리고 그 옆에
짧게 메모를 남겼다

넘지 않는 이유
서로를 지키기 위해

그 문장을 보며
서이는 가슴이 묘하게 아려왔다

선을 긋는 작업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이야기를 쓰다 보면
자꾸만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향해 다가가려 했고
서이는 그 장면을 고치면서도
마음 한쪽이 따라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는
손을 잡지 않게 하고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만 마주치고
말은 안 하게 하죠

이런 식의 대화가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럴수록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묘하게 더 진해졌다

선을 긋는다는 것은
떨어져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선을 계속 의식하게 만든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이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진씨
우리는
이야기랑 현실은
다른 거죠

우진은 그 질문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달라야죠

그 말은
정답처럼 들렸지만
확신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서이는 그 대답에
조금 안도하면서도
조금 더 불안해졌다

잠깐의 휴식 시간
둘은 각자 창가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언덕 아래 골목은
평소보다 더 어두웠고
사람 그림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서이는 창문에 비친
자신과 우진의 모습을 보았다
나란히 서 있지만
아주 미세하게
떨어져 있는 두 사람

그 거리가
지금의 관계를
정확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우진이 갑자기 말했다

서이씨
혹시
이렇게 만나면서
불편한 건 없어요

그 질문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서이는 잠시 생각했다

불편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편하다고 하면
더 큰 거짓말일 것 같아요

그녀는 솔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오는 건
싫지 않아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래요

그 짧은 대답 안에는
말하지 않은 감정들이
너무 많이 담겨 있었다

그날 대본 작업은
평소보다 일찍 끝났다

서이는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요
너무 늦으면
안 좋을 것 같고요

그 말은
현실을 향한 마지막 방어처럼 들렸다

305호 불을 끄고
복도로 나왔을 때
두 사람은 나란히 서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
서이는 잠시 멈췄다

우진씨

오늘
선 긋는 거
잘한 것 같아요

우진은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래야죠
그래야
계속 쓸 수 있으니까

그 말은
이야기를 계속 쓰기 위해서인지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서이는 계단을 내려가며
한 걸음 한 걸음
선을 되새겼다

그러나
마음은
선을 긋는 연습을 할수록
자꾸만
그 선 너머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서이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305호에서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천천히 흘러갔다

선을 넘지 않기로 한 약속
선을 의식할수록 커지는 마음
그 두 가지가
서이의 가슴 안에서
같은 크기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알았다

선을 긋는다는 것은
끝내 넘지 않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넘고 싶다는 마음을
하루하루 참아내는 일이라는 것을

그 연습은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연습이
언젠가
완전히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서이는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