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는 그날 이후
305호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의식적으로 멈춘 것이었고
억지로 멈춘 것이었다
마음은 이미 수없이 다락방 계단을 오르고 있었지만
몸만이 그 마음을 붙잡고 있었다
퇴근 후
늘 분식집 쪽으로 향하던 길에서
서이는 집으로 바로 올라갔다
우산을 접고
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르며
자신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오늘은 가지 말자
오늘만은
내일은 모르겠지만
오늘은
집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남편은 출장 중이었고
전화도 없었다
서이는 가방을 내려놓고
불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는
언덕 아래의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불빛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우진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가 대본을 넘기며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
문장을 고치다 말고 잠시 생각에 잠기던 표정
그리고
계단에서 조용히 웃던 얼굴
서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이제는 멈춰야 한다고
하지만 생각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날 밤
우진은 305호에서 혼자 대본을 펼쳤다
서이가 앉아 있던 의자는 비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그녀가 늘 쓰던 연필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연필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아무 글자도 쓰지 못했다
서이가 없는 공간은
이야기를 쓰기에는 너무 넓었고
너무 조용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 늦지 않은 시간
그녀에게 전화를 걸까
아니면 메모를 남길까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먼저 다가가면
서이가 어렵게 만든 거리마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기다리기로 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서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우진은 퇴근 후
습관처럼 여인숙 앞까지 왔다가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계단을 오르지 않고
그 아래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 며칠 동안
언덕마을의 저녁은
유난히 길었다
서이는 집에 일찍 들어와
TV를 켜 두었다
화면 속 인물들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그녀의 마음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식탁 위에 혼자 놓인 밥그릇
식어가는 국
그 풍경은
결혼 초에도
출장이 잦아진 뒤에도
늘 반복되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익숙한 풍경이
유난히 견디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비교가 생겼기 때문이다
305호의 작은 책상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던 의자
대본 위에 겹쳐지던 손 그림자
그 모든 장면이
머릿속에서 너무 또렷했다
서이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건
사랑일까
아니면
외로움이 만든 착각일까
그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우진은 방송국에서도
점점 더 말수가 줄어들었다
원고는 예정대로 나갔지만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비어 있었다
동료들은
그가 피곤해 보인다고 말했고
그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괜찮아요
좀 쉬면 나아질 거예요
그러나
그가 쉬고 싶은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퇴근 후
그는 집으로 돌아와
라디오를 켜 놓고
아무 소리도 듣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꾸만
옆집 쪽 창문으로 향했다
서이의 집
불은 켜져 있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커튼은 늘 반쯤 닫혀 있었고
그 너머에는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 창문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늘도
안 오는구나
며칠이 지나
서이는 회사에서
우진의 이름을 떠올렸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문서를 정리하다가
라디오 광고 문구를 보다가
그냥
그 이름이 스쳤다
그 순간
그녀는 손을 멈췄다
왜 이렇게
그 사람이
자꾸 생각날까
그 질문은
그녀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이는 분식집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라면 끓는 소리
익숙한 냄새
예전 같았으면
그 문을 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대로 돌아섰다
지금 들어가면
우진이 있을 것 같았고
그를 보면
그동안 애써 만든 거리가
한 번에 무너질 것 같았다
그날 밤
우진은 대본을 정리하다가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서이가 고쳐 쓴 문장
여자 주인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문 앞에 서 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우진은 알았다
서이는
지금
그 장면 속에 있다는 것을
그는 종이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불을 끄고
천천히 누웠다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서이가 사라진 저녁들은
우진에게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남았다
그녀가 없는 시간은
그녀가 있던 시간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그것은
부재가 만든 존재감이었다
서이는
자신이 일부러 만들어낸 공백 속에서
우진의 자리를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점점 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언덕 위에서
서로를 피해
서로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지만
서이가 사라진 저녁들은
이미
두 사람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