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6부 말하지 못한 고백은 몸에 남는다

그날 이후
서이와 우진은
의도적으로 305호를 피했다
서로 연락하지도
약속하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각자의 하루는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서이는 퇴근 후
집으로 곧장 올라갔다
집 안의 공기는
언제나처럼 조용했고
남편의 흔적은
전화기 속 메시지 몇 줄뿐이었다
출장이 길어질 거라는 말
바쁘다는 말
늘 같은 문장들

그 문장들을 읽으며
서이는 자신이 더 이상
화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무감각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식탁에 앉아
혼자 저녁을 먹다가
문득
계단 아래에서 마주쳤던
우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말을 아끼던 표정
그러나 숨기지 못했던 눈빛

그 눈빛은
서이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우진 역시
집에 돌아와
라디오를 켜 두고
아무 소리도 듣지 않았다
방 안에 울리는 것은
기계의 잡음과
자신의 숨소리뿐이었다

책상 위에는
미완성의 대본이 놓여 있었다
서이의 손글씨가 남아 있는 여백
고쳐 쓰다 만 문장들

우진은 그 종이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접어 서랍에 넣었다
지금은
그 글을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창가에 서서
언덕 너머를 바라보았다
서이의 집 쪽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불빛은
멀리서도 분명하게 보였다

그는 그 불빛을 보며
말하지 못한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괜찮냐고
힘들지 않냐고
그리고
보고 싶다고

그러나 그 말들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며칠 뒤
서이는 회사에서
우진의 라디오를 들었다
우연히 켜 놓은 라디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 목소리는
그녀의 손을 멈추게 했다

우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고
조금 느렸다
마치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는 것처럼

그날의 방송은
누군가의 사연을 읽는 형식이었지만
서이는 그 이야기가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
우진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다

사연 속의 남자는
말하지 못한 마음을
글로만 남기고
그 글조차
상대에게 전하지 못한 채
혼자 간직하고 있었다

서이는 라디오를 끄지 못했다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 방송이 끝난 뒤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서이의 마음을
조용히 두드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서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언덕 아래에서
우진을 보았다

이번에는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올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에
조금 천천히 걸었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길 한복판에서
마주 섰다

서이는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라디오 들었어요

우진은 놀란 듯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서이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 이야기
좋았어요

우진은
짧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숨기지 못한 긴장이 있었다

둘은
천천히
언덕 위로 걸어 올라갔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계단 아래에서
서이는 멈춰 섰다

우진씨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을 고르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 이야기
라디오에서 말한 거
혹시
우리가 쓰던 이야기랑
조금 닮은 것 같았어요

우진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조금요

그 짧은 대답은
사실상
고백에 가까웠다

서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조여 왔다
그러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저도
그랬어요

그녀의 말은
조용했지만
분명했다

둘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진실의 시간이었다

우진이 먼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이씨
이제는
이야기랑 현실을
계속 분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그래서
더 무서워요

그 말은
도망치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는 인정이었다

우진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손을 뻗지는 않았다
그 거리는
마지막 남은 경계였다

그는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서이는
그 말이
붙잡지 않겠다는 약속이자
기다리겠다는 다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온 서이는
문을 닫고
등을 기대었다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말하지 못한 고백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몸에 남아 있었다
숨에 남아 있었고
맥박에 남아 있었고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해졌다

우진 역시
집에 돌아와
불을 켜지 않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말하지 않은 말
하지 않은 행동
그 모든 것이
그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각자의 침대에 누워
같은 생각을 했다

이미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 감정이
조용히
몸 안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감정은
아무리 애써 숨겨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말하지 못한 고백은
그렇게
두 사람의 안쪽에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