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서이는 집에 들어와도
바로 불을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고
천천히 숨을 고르며 서 있었다
집은 조용했고
남편의 기척은 없었다
그 조용함은 이제
낯설지 않았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젖혔다
언덕 아래 도로에는
가로등 불빛만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차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 고요함 속에서
서이는 조금 전 우진과 나란히 서 있던 순간을 떠올렸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분명한 온도가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아도
서로가 거기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느낌
그 느낌이
집 안까지 따라 들어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었다
서이는 부엌에 불을 켰다
컵을 꺼내 물을 따르다 말고
손이 잠시 멈췄다
오늘 하루
그를 기다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약속도 없었고
연락도 없었지만
마음은 이미
언덕 아래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 사실이
서이를 조금 두렵게 만들었다
우진은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라디오 원고는 이미 정리되어 있었고
내일 방송 준비도 끝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불을 켜 놓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오래된 노트가 한 권 놓여 있었다
305호에서 함께 쓰던 대본
서이의 글씨가 남아 있는 노트였다
우진은 그 노트를 펼쳤다가
다시 덮었다
지금 이 밤에
그 노트를 펼치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불러올 것 같았다
그는 대신
창가에 서서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서이의 집 쪽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불빛을 보는 순간
우진의 마음은
이미 그 집에 가 있었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계단을 오르고
문 앞에 서 있고
노크를 하고 싶어 했다
그는 그 충동을
억지로 눌렀다
지금은
아직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며칠 동안
두 사람은
의도적으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공백은
거리를 만들기보다
오히려
생각할 시간을 늘려 주었다
서이는 회사에서
문서를 정리하다가
문득
우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라디오에서가 아니라
계단 아래에서
낮게 말하던 그 목소리
그 목소리는
서이의 하루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우진 역시
방송 중
문득
서이를 떠올렸다
청취자에게 보내는 말처럼
부드럽게 말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조금 느려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 느려진 호흡 속에서
그는 깨달았다
이제는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이미 마음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그날 저녁
언덕마을에는
오랜만에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가로등이 흔들리고
나뭇잎이 계단을 굴러 내려왔다
서이는
바람 소리에 창문을 닫으려다
문득
밖을 바라보았다
언덕 아래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우진이었다
그는 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서이는
순간적으로
생각보다 빠르게
집을 나섰다
코트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
계단을 내려갔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우진은
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를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서이씨
그 한마디에
그의 목소리는
이미 안도와 놀람이 섞여 있었다
서이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바람이 너무 세서요
창문이 계속 흔들려서
그 말은
핑계였지만
우진은 묻지 않았다
네
오늘 바람이 세네요
둘은
바람이 부는 언덕 아래에서
마주 서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우진이 말했다
이상하죠
약속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자꾸
서이는 그 말을 이어받았다
마주치게 되는 거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짧은 대답 속에는
부정도
변명도 없었다
서이는 손을 모아 쥐며 말했다
요즘
자꾸
마음이 먼저 움직여요
생각보다
그 말은
고백에 가까웠다
우진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숨을 멈췄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저도요
그래서
조금 무서워요
서이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런데도
이렇게 내려오게 돼요
그 말은
스스로를 탓하는 말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다는 인정이었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고
둘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그 흔들림 속에서
둘의 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러나
손이 닿을 만큼은 아니었다
아직은
그 마지막 선이
남아 있었다
우진이 말했다
오늘은
조금만
같이 서 있어요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것으로 충분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이미 먼저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둘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러나
헤어진 뒤에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서이는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가만히 서 있었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우진 역시
집에 돌아와
불을 켜지 않은 채
창가에 섰다
두 사람은
각자의 공간에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마음은
몇 번이나
서로에게 먼저 도착해 버렸다는 사실
이제 남은 것은
그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선택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시간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