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부터
서이와 우진은
서로의 이름을
입 밖으로 거의 꺼내지 않았다
불러야 할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부르는 순간
지금 유지하고 있는 균형이
깨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름은
사람을 현실로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이 관계를
완전히 현실로 만들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둘은
눈으로만 알아보고
목소리로만 확인했다
멀리서도
걸음걸이로
숨소리로
서로를 알아보는 법을
이미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서이는 요즘
집에 있어도
집에 있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남편의 물건들은 그대로 있었고
가구의 위치도 변한 것이 없었지만
그 공간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저녁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문자가 아닌
전화였다
서이는 잠시
벨이 울리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는
익숙했지만
낯설었다
안부를 묻는 말
바쁘다는 말
곧 돌아가겠다는 말
서이는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기다리고 있었다고
언제 오는지
왜 연락이 없었는지
묻고 싶었을 말들
그러나
그날의 서이는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알겠어
조심히 와
그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끝난 뒤
이상하게도
가슴은 아프지 않았다
그저
아주 조용했다
그 고요함이
서이를 조금 무섭게 했다
우진도
비슷한 고요 속에 있었다
아내는
여전히 집에 거의 머물지 않았고
그 사실에 대해
이제는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느 날
아내가 짐을 조금 챙겨 나가며 말했다
며칠
친정에 다녀올게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심히 다녀와
그 말은
허락도
배웅도 아닌
그저 사실을 받아들이는 말이었다
문이 닫히고
집 안에 혼자 남았을 때
우진은 소파에 앉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 집에서
사람이 빠져나가는 소리는
이제
놀랍지 않았다
그날 저녁
서이와 우진은
언덕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쳤다
서로를 보고
아무 말 없이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도
같이 걷는 일이
너무 자연스러워졌다
조금 걷다가
서이가 말했다
오늘
전화 왔어요
우진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었다
남편분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온대요
곧
그 말 뒤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우진은 잠시 후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때요
서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아무 느낌이 없어요
그게
이상할 만큼
그 말은
슬픔도
분노도 아닌
비어 있음에 가까웠다
우진은 그 대답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저도
비슷해요
그 한마디로
둘은
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서로의 상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걷던 길 끝에서
둘은 멈췄다
항구 불빛이 보이는 곳
바람이 조금 불었고
공기는 차가웠다
서이는
무심한 듯 말했다
이상하죠
이렇게 같이 걷고 있는데
서로 이름도 안 부르고
우진은
아주 작게 웃었다
부르면
다르게 느껴질 것 같아서요
서이는 그 말의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이 관계는
숨을 곳이 없어질 것이다
지금처럼
모호한 경계 안에
머무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대로가 좋아요
우진은
그 말이
영원히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날 밤
서이는 집에 돌아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이름을 부르지 않은 채
가장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
그 관계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얼마나 진짜인지
서이는
둘 다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우진 역시
집에 돌아와
조용히 창가에 섰다
언덕 위의 불빛들
그 중 하나가
서이의 집이라는 것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입 밖으로는
끝내 내지 못한 채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방식은
그들이 선택한
가장 안전한 거리였다
그러나
그 안전함은
아주 얇은 종이처럼
언제든
찢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종이를 찢게 될 순간은
생각보다
가까이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