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돌아온 날 저녁
집 안에는
오랜만에 사람의 기척이 있었다
캐리어가 바닥에 닿는 소리
코트를 벗어 거는 소리
익숙했지만
이미 오래전의 기억처럼 느껴지는 소리들
서이는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있었다
남편은 거실에 앉아
출장 이야기를 짧게 늘어놓았다
회의가 어땠는지
어디를 다녀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들었다
듣고는 있었지만
말들이 마음에 닿지는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분명히 집 안에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다른 곳에 머물러 있었다
언덕 아래
가로등 불빛
그리고
이름을 부르던 순간
그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식탁에 마주 앉아
저녁을 먹었다
젓가락 소리만
간간이 울렸다
남편이 말했다
요즘
회사 일은 어때
서이는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
비슷해
늘 그렇지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진실도 아니었다
그녀의 하루는
이미
회사와 집 사이가 아니라
언덕 아래를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 역시
이 집에서
깊은 대화를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침묵은
편안함이 아니라
오래된 포기 같았다
그날 밤
서이는 남편보다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불을 끄고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같은 공간에 있었던 사람보다
지금
같이 있지 않은 사람이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우진의 목소리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순간
그 짧은 소리 안에 담긴
결심과 흔들림
서이는
이불 속에서
손을 꼭 쥐었다
지금 이 집 안에는
돌아와 있는 사람이 있었고
자신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이제는
명확했다
우진은
그날 밤
혼자 집에 있었다
아내가 돌아오지 않은 집
조용한 방
켜진 스탠드 불빛
그는
책상 앞에 앉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서이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은
자꾸 그쪽으로 흘러갔다
그녀의 남편이
오늘 돌아온다는 말
그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상 오늘이 되자
가슴 한쪽이
묘하게 무거워졌다
우진은
라디오를 켜지 않았다
오늘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대신
창가에 서서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불빛은
분명히
그녀가 집에 있다는 신호였다
그는
그 불빛을 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돌아온 사람과
돌아오지 않은 마음
그 둘 사이에서
서이는
지금
어떤 얼굴로 앉아 있을까
다음 날 아침
서이는 평소처럼
출근 준비를 했다
남편은 아직 잠들어 있었고
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거울 앞에 선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자신만은 알고 있었다
이미
어떤 선은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그날 저녁
서이는 퇴근 후
집으로 바로 올라가지 않았다
가방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망설임은 없었다
언덕 아래에는
우진이 서 있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서이는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오늘
집에 사람이 있었어요
우진은
그 말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
그래서요
서이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
이상하게도
더 외로웠어요
그 말은
솔직했고
되돌릴 수 없었다
우진은
한 발짝 다가왔다
돌아왔는데도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돌아왔는데도
둘은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그 침묵은
전과 달랐다
이제는
선택의 침묵이었다
우진이 말했다
서이
지금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알아요
서이는
그의 이름을 들으며
고개를 들었다
나도 알아
근데
이미
마음은
집에 없어요
그 말은
고백이었고
결정이었다
그날 밤
둘은
더 오래 걷지 않았다
각자의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잡지는 않았지만
이미
서로의 마음은
확실히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돌아와 있는 사람과
돌아오지 않은 마음
그 사이에서
서이와 우진은
이제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는
지점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지점은
다음 선택을
피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