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는 그날 아침
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떴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시간
집 안은 고요했고
남편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서이는 침대에서 조용히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그 공기 속에서
이 집의 냄새가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
이곳에서 맡았던 공기
이곳에서 지켜야 했던 역할
그 모든 것이
이미 과거의 층으로
천천히 밀려나고 있었다
서이는 소파에 앉아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떠난다고 말하지도
남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말하지 않은 선택은
그 자체로 시간을 만든다
결정을 미루는 동안
시간은 조용히 쌓인다
우진의 아침도
유난히 조용했다
아내는 먼저 집을 나갔고
부엌에는
식지 않은 커피 냄새만 남아 있었다
우진은 컵을 씻다가
잠시 손을 멈췄다
어제 밤
서이의 얼굴
그녀가 말하던 목소리
떠나야 할 것 같다는 말
그 말은
결심처럼 들렸지만
끝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완성되지 않은 말이
가장 오래 남는다는 것을
그날 하루
서이는 회사에서도
말수가 적었다
동료의 질문에도
짧게 대답했고
불필요한 대화는
의식적으로 피했다
점심시간
창가에 앉아
사람들이 오가는 길을 바라보며
서이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떠나면
이 사람들은
얼마나 빨리
나를 잊을까
그 질문에
답을 찾지 않았다
잊히는 속도보다
지금의 마음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우진은 방송국에서
원고를 정리하며
자주 멈췄다
문장을 쓰다 말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그날의 방송은
유난히 담담했다
누군가의 사연을 읽으며
우진은 그 사연이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아직은
자신의 이야기를
말로 꺼낼 수 없었다
해가 지고
언덕마을에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서이는 자연스럽게
집을 나섰다
오늘은
결심을 말하러 가는 날이 아니었다
확인하러 가는 날이었다
언덕 아래에는
우진이 있었다
이번에도
서로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서이가 먼저 말했다
오늘은
아무 말도 안 하려고 왔어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럴 것 같았어요
둘은
말없이 걸었다
발걸음은 느렸고
방향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걷다가
서이가 멈춰 섰다
만약
내가
아무 말도 안 남기고
그냥 떠나면
그 말은
질문이 아니라
가정이었다
우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럼
남은 사람은
그 말을 대신 만들어서
평생 가지고 살겠죠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을 못 하겠어요
그 말에는
비겁함보다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우진은 조용히 말했다
말하지 않으면
시간이 남아요
시간은
사람을
더 오래 붙잡아요
그 문장은
경고이자
사실이었다
둘은
가로등 아래에 멈춰 섰다
서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희미한 별 하나가 보였다
서이는 낮게 말했다
나
아직
당신한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죠
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래서
지금까지
여기 있는 거예요
그 말은
원망이 아니었다
그저
현재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말한 것이었다
서이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지금
아무 말도 안 하면
당신은
기다리게 되겠죠
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이미 대답이었다
그날 밤
둘은 오래 서 있지 않았다
말도 많지 않았다
헤어지기 전
서이는 말했다
아직
마지막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은요
그 말은
기대라기보다
현실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서이는
문을 닫고
한참을 서 있었다
집 안에는
남편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불은 꺼져 있었다
그 풍경은
아직
변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모양뿐이라는 것을
우진 역시
집에 돌아와
창가에 섰다
언덕 위의 불빛
그 불빛이
언제까지
저 자리에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남기지 못한 말은
결국
시간을 남긴다
그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게 하고
기다림은
사랑과
후회를
같은 얼굴로 만든다
서이와 우진은
지금
그 시간의 초입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이제
되돌릴 수 없이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