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완전히 지나가고, 도시의 흐린 낮빛이 서서히 누렇게 바래가던 시간. 리테는 아직 방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두 손은 침대 옆 기둥을 잡고 있었고, 손등에는 약간의 힘이 남아 있었다. 그 힘은 계단 아래에서 들린 목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몸속 어딘가 깊은 곳에서 스스로를 붙잡고 있는 불안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방 안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이곳에 도착한 경로를 떠올릴 수 없었지만, 이 방 자체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낯설고 또 익숙한 느낌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침대 아래에서 찾아낸 작은 열쇠는 아직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그 열쇠에 희미한 금속빛을 드리웠다. 그 빛은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열라는 듯 속삭이며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리테는 곧바로 그 열쇠를 집지 않았다.
대신 방 안의 또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까 아침에 발견했던 그 벽. 칠이 벗겨져 있고, 약간 눌러보면 움푹 들어가는 듯한 그 부분. 마치 누군가가 오랫동안 감춰두고 싶었던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한 벽.
리테는 그 앞에 섰다. 손끝이 약간 떨렸지만 그녀는 천천히 손을 벽에 대었다. 벽지는 오래되어 약한 힘에도 쉽게 뜯겨 나갈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벽지 한 조각을 잡고 조금씩 떼어냈다. 오래된 풀 냄새가 가볍게 풍겼다. 벽지가 한 겹 벗겨지자 그 아래에는 더 거칠고 어두운 색의 벽면이 드러났다.
그리고 조금 더 뜯자 리테는 그 안에 아주 얇게 틈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벽과 벽 사이에 만들어진 감춰진 공간.
그녀는 숨을 참으며 손가락을 틈으로 넣었다.
틈은 생각보다 더 깊었다. 손가락 끝이 닿는 물건이 있었다. 차갑고 딱딱하고, 모서리가 둥근 어떤 물체.
리테는 그것을 천천히 잡아끌어냈다.
먼지가 잔뜩 쌓인 얇은 금속 상자였다. 규격은 작은 도시락통만큼이나 작았고, 상자는 무겁지 않았지만 묘한 무게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상자 윗면에는 아무 글씨도 없었다. 벗겨진 페인트 조각과 손때가 묻은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리테는 탁자 위로 상자를 옮겼다.
금속 상자의 잠금장치는 이미 부서져 있었는지 힘을 주어 밀자 쉽게 열렸다.
뚜껑이 열리는 순간 먼지가 공중에 흩졌고, 그 안에서 오래된 종이 몇 장과 작은 녹슨 열쇠 하나가 나타났다.
리테는 종이를 먼저 꺼냈다. 종이는 오래되어 약간 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었고, 가장자리는 조금 찢어져 있었다.
첫 번째 종이에는 짧은 기록이 적혀 있었다.
나는 결국 이 방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지만,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들이 있다.
글씨체는 붓펜 같은 것으로 급하게 적은 듯 삐뚤삐뚤했다.
두 번째 종이에는 긴 문장이 있었다.
B2는 출입구가 아니다.
진짜 문은 벽 뒤에 숨어 있다.
아무도 그곳을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
벽 뒤라는 말을 본 순간, 리테는 방금 자신이 벽을 뜯어낸 행동이 우연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오래전의 누군가가 남겨놓은 흔적을 자신이 다시 찾게 되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듯한 기묘한 느낌.
세 번째 종이에는 더 의미심장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내 그림자를 되찾기 전에는 절대 지하로 내려가지 마라.
그림자가 사라졌다면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그림자.
리테는 그 단어를 속으로 되뇌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림자라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기억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존재일까.
그녀는 종이를 접어 다시 상자 안에 넣고, 이번엔 녹슨 열쇠를 들어 올렸다.
작고 낡았지만 분명 어떤 문을 열기 위해 만들어진 열쇠였다. 그러나 이 열쇠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리테는 열쇠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 방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누군가가 왜 벽 속에 상자를 숨겨 놓았던 것일까.
그리고 그 모든 흔적을 지금 자신이 발견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순간 다시 그 장면이 보였다.
어두운 복도. 차갑게 젖은 바닥.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있었던 기억. 발소리가 두 개뿐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뒤쪽에서 따라오는 또 다른 그림자들.
그리고 계단 아래에서 느껴졌던 묘한 숨소리.
그 존재는 여전히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리테는 손에서 열쇠를 내려 놓고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문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도어락이 울린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문손잡이를 돌린 것도 아니었다. 마치 바깥에서 스치는 그림자의 무게가 문에 살짝 닿은 것처럼 흔들림이 아주 미세하게 전달되었다.
리테는 본능적으로 문 옆으로 다가갔다.
숨을 죽이고 귀를 문에 가까이 대었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발끝을 들고 걷는 듯한 아주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복도 끝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느리지만 일정한 간격.
그리고 바로 문 앞에 멈추었다.
리테의 심장은 조용한 방 안에서 너무 크게 뛰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적.
복도에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녀는 손을 문손잡이 위에 올려놓았다. 누군가가 방금 전에 잡았던 듯 문손잡이가 아주 약간 따뜻했다.
누구지.
그 질문은 입으로 나오지 않고 마음속에서만 공명했다.
이 방을 알고 있는 사람일까.
이 방의 주인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이곳으로 옮긴 사람일까.
문을 열고 나가면 그 사람을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이미 사라진 그림자뿐일까.
리테는 문을 당겼다. 아주 천천히.
밖으로 이어지는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빛은 옅었고, 공기는 정체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분명히 현관 앞에 있었던 존재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녀는 복도 끝까지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복도 맨 끝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검은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림자는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뚜렷한 형태를 갖고 있었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는 코트를 걸친 듯 보였고, 걸음걸이는 너무 조용해서 사람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리테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 모퉁이에는 빌라의 또 다른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복도의 끝에서도 그림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림자는 누구였을까.
지금의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이 방과 관련된 과거의 인물일까.
리테는 천천히 돌아서서 다시 방으로 걸어갔다.
문을 닫으려 할 때, 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작은 종이 조각이었다. 아니, 종이가 아니라 얇은 플라스틱 카드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플라스틱 카드는 오래된 출입카드처럼 보였고, 한쪽 구석이 살짝 깨져 있었다. 카드 앞면에는 그림이 희미하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심연극장.
그 단어가 바로 카드 정면에 새겨져 있었다.
이 도시에 존재하는 오래된 연극 공연장인지, 혹은 비밀 공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도시 안내 지도에서도 보았던 단어였고, 유라라는 소녀가 언덕 위에서 손가락으로 짚었던 그 장소였다.
리테는 카드를 안쪽으로 빛에 비춰보았다.
그 안에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리세 전용 구역.
그 순간 그녀의 손이 살짝 떨렸다.
리세.
자신이 수첩에서 본 단어.
지갑에서 본 단어.
도시 어딘가에서 계속 자신을 따라다니는 이름.
그리고 지금, 목에 걸고 있던 금속 조각에 새겨진 단어.
리테는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거기에는 리테라는 글자가 거칠게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손에 있는 카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리세라는 이름이 이 방과, 이 도시와, 그리고 이 지하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두 이름.
리테.
리세.
둘 중 하나는 자신일까.
둘 다 자신일까.
혹은 둘 중 어느 것도 자신이 아닐까.
그 순간 방 안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바깥에서 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약간 흔들렸고, 창문 틈 사이로 도시의 낮과 밤 사이에 매달린 빛들이 느릿하게 들어왔다.
리테는 다시 카드를 들여다보았다.
카드 아래쪽에는 작은 문장이 더 적혀 있었다.
너는 결국 돌아오게 되어 있어.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그녀는 다시 눈앞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문이 다시 흔들렸다.
이번에는 아주 명확히 들렸다.
문손잡이가 한 번, 다시 한 번 움직였다.
누군가가 문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리테는 숨을 멈추고 문에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손잡이는 천천히 돌아갔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잠금장치를 걸어두었기 때문이었다.
문 너머에서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그 숨소리는 어젯밤 계단 아래에서 들었던 숨소리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익숙하지만 낯설고, 인간 같지만 어딘가 인간이 아닌 울림.
그 숨소리가 멈추더니, 아주 낮고 길게 이어진 목소리가 문을 통해 흘러 들어왔다.
리세.
그 목소리는 한 단어만을 말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그 한 단어는 방 안의 공기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리테는 손을 떨며 목걸이를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문 밖에서 들린 마지막 말이 그녀를 얼어붙게 했다.
돌아왔구나.
문밖의 존재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천천히 멀어졌다.
복도 끝으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리테는 그 자리에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아직 자신의 기억을 찾지 못했다.
누가 자신을 쫓고 있는지, 왜 자신을 이 방으로 데려왔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름이 리테인지, 리세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이 방은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다.
지하에는 또 다른 문이 있다.
심연극장은 이 도시 밑바닥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가운데에는 한 이름이 얽혀 있다.
리세.
그리고 방 안 공기를 갈라놓듯 깨닫게 되는 마지막 사실.
지금 이 순간 언덕 위의 빛의 항로를 걷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가 바로 자신과 이어져 있다는 느낌.
비록 서로는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도시 전체가 두 사람 사이에 숨겨진 균열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리테는 손끝에 남아 있는 금속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바람이 창밖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지금부터 만나는 모든 그림자와 모든 발걸음은, 누군가를 만나는 길이라는 것을.
그 누군가는 지금, 바로 빛의 항로 위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