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이 열린 골목은 마치 도시가 입을 벌려 무언가를 삼키려는 모습처럼 보였다. 어둠의 균열은 아주 천천히 벌어진 채 그 안쪽 깊이를 드러내고 있었고, 그 틈 사이에서 올라오는 공기는 이상할 만큼 온기가 없었다. 따뜻함도 차가움도 없는 공기. 온도라는 감각이 사라진 층에서만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은 공기였다.
유라와 리테는 동시에 숨을 죽였다. 그들의 머리 위로 가로등 불빛이 흔들렸고, 그림자는 도로 위에서 천천히 일렁였다. 종소리도, 바람도, 그 모든 신호가 잠잠해진 순간 오직 한 사람만이 그 틈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남자.
긴 코트의 끝자락이 어둠과 닿는 지점에서 기묘하게 흔들렸다. 남자의 얼굴은 빛과 어둠의 중간 경계 위에 서 있었고, 눈빛은 깊어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손을 천천히 들어 두 사람을 향해 뻗었다.
왔구나
그 한마디는 환영도 아니었고 분노도 아니었다. 마치 어쩔 수 없이 언제든 이 순간이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람의 말처럼 담담했다.
유라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몸은 뒤로 움직였지만 시선은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누구야
그녀가 조용히 속삭이듯 말하자 남자는 고개를 아주 천천히 갸웃했다.
나를 모르겠지. 아직은.
이 말은 리테의 심장을 크게 울렸다.
아직은
이 말은 마치 그녀가 언젠가 이 남자를 분명 알고 있었다는 뜻처럼 들렸다.
리테는 손을 꼭 쥐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에 걸린 금속 조각을 느끼며 입술을 떨었다.
당신은 누군데 나에게 리세라고 부르는 건데
남자는 리테의 말에 순간 표정을 바꾸지 않았지만,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멈칫했다. 그 반응은 짧았지만 분명했다.
그는 리테가 아닌 리세라는 이름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만, 그림자는 지워지지 않아. 너는 아직 너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으니 나도 너를 완전히 잃지는 않았지.
그 말은 묘하게 위협적이면서도 절절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유라는 한 손으로 배낭 끈을 꽉 쥐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찾기 위해 이 도시에 왔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보는 장면은 자신이 상상한 것 중 가장 어둡고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리테를 바라봤다.
리테도 그녀를 바라봤다.
둘은 서로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이 순간 서로만이 의지할 수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리테는 천천히 유라에게 다가갔다.
유라도 미세한 거리만큼 다가왔다.
둘 사이에 있는 공기는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 속에서 리테는 아주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아주 오래전 누군가가 손을 잡아끌던 기억
누군가가 이름을 부르던 소리
누군가가 자신을 밀어올려 빛의 항로 끝까지 데리러 가겠다고 약속하던 감각
그 기억의 조각들은 모두 희미했다.
그러나 그 조각들이 보여주는 잔상에는 한 명의 소녀가 있었다.
유라와 비슷한 나이의 소녀
사진 속 여름햇살 아래 자신과 함께 서 있던 소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던 따뜻한 팔
그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리테는 숨을 삼켰다.
유라.
유라는 분명 자신이 잊어버린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리세라는 이름과도 얽혀 있었다.
리테가 유라의 손을 잡으려 순간적으로 손을 들었을 때 남자의 목소리가 더 깊게 울렸다.
아직은 연결하면 안 돼.
그 말은 칼처럼 예리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났다.
그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희 둘의 그림자가 한 곳에서 겹치는 순간 길이 열려버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원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만 아직 아니야. 아직 너희 둘은 기억을 돌려받지 못했지.
그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무언가 중요한 암시를 품고 있었다.
기억
그림자
두 사람의 연결
심연극장
모든 조각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질 듯 말 듯 했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돌려 골목 끝에 열린 틈을 가리켰다.
그 틈 안에서 희미한 조명이 내려오고 있었고, 계단이 어둠 속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너희는 지금 선택해야 해. 이 계단 아래로 내려갈 것인지. 아니면 돌아갈 것인지.
남자의 말은 유난히 조용했지만 골목 전체가 울리는 것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유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해.
왜 나를 여기에 부른 거야.
남자는 반사적으로 미소를 거두었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
너는 오지 않으면 결국 죽기 때문이지.
유라는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공기마저 차갑게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무슨 소리야
왜 죽어
그러나 남자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위를 떠난 걸 절대 허락하지 않았거든.
그녀
남자가 말한 그녀가 누구인지 아무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 리테의 머릿속에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리세
리테는 숨을 들이마시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리세를 알고 있지.
그렇지.
그녀는 누구야.
남자는 긴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지.
하지만 네가 기억해야 할 사람이야.
내가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스스로 가는 곳에서 찾게 될 사람이야.
유라는 계단 아래를 바라봤다.
차갑고 깊은 어둠.
그 아래 무엇이 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계단에 내려가는 순간 이 도시는 더 이상 단순한 도시가 아니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 아래에는 기억의 파편을 지닌 존재들
잃어버린 그림자들
사라진 이름들
연결된 두 소녀의 과거
몸에 베어 있는 금속 가루처럼 지워지지 않는 악몽이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리테는 손을 가슴에 올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더 강하게 끌어당기는 감정이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자신이라는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시작점
자신이 누구인지 결정짓는 단 하나의 열쇠
그 열쇠가 심연극장 아래에 있다면 내려가야 했다.
유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이 도시에 온 이유
그녀가 손에 쥔 사진
사진 뒤에 적힌 이름
가방 속에 숨겨진 오래된 주소
그리고 방금 자신을 본 리테라는 소녀에게 느낀 기묘한 친밀감
이 모든 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겁고 크다.
유라는 한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리테도 동시에 한걸음 내딛었다.
남자는 조용히 두 사람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렸고, 골목의 균열이 더 크게 벌어졌다.
심연극장의 문이 완전히 열린 것이다.
계단 아래에서 가벼운 기류가 흘러 올라왔다. 금속과 먼지와 오래된 기록물의 향기.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오랫동안 숨을 죽이며 기다려온 공간의 냄새.
유라가 리테의 옆에 섰다.
리테는 떨리는 손을 조용히 들어 올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로의 손을 잡지 않았다.
남자가 경고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직감적으로 그 경고가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을 잡는 순간 무언가 돌이킬 수 없이 열릴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을 지금 당장 만들 필요는 없었다.
유라는 계단 위 첫 발을 조심스럽게 내딛었다.
리테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기억을 찾으려면, 먼저 손에 쥔 그림자를 내려놓아야 해.
그리고 그 그림자를 다시 찾게 될 때 너희 둘은 진실을 보게 되겠지.
계단 아래 어둠은 깊었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에게는 두려움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리세
그녀가 남긴 이름
그녀가 남긴 그림자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심연의 가장 깊은 곳
두 소녀는 마침내 첫걸음을 내딛었다.
심연극장은 그들을 이미 환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