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12부 이름의 균열을 향해 걸어가는 자들

문을 지나자마자 공기가 바뀌었다.
아니 정확히는 공기가 ‘무너졌다’라는 표현이 더 가까웠다.
유라와 리테가 들어선 공간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으며, 건조하지도 습하지도 않았다. 마치 공기라는 개념이 붕괴된 세계였고, 대신 아주 오래된 숨결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둘은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숨은 폐 속으로 제대로 도달하지 않았다.
그냥 공기가 지나가는 느낌만 있었고, 산소의 감각은 희미해졌다.

리테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문 뒤 공간은 극장도, 방도 아니었다.
그 어떤 언어로도 정의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원형 구조물.
위아래의 개념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천장과 바닥.
천장이든 바닥이든 그것은 빛을 머금고 부드럽게 일렁였다.
복잡하게 얽힌 뼈의 구조를 연상케 하는 하얀 곡선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 틈에서 미세하게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유라는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은 투명에 가까웠다.
아니 투명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걷는다는 감각은 존재했지만 발이 닿는 대상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걷자 바닥 아래에서 무언가 울렸다.
미세한 진동이 발목까지 올라왔다.

리테는 자신도 모르게 유라의 손을 잡을 뻔했다.
그러나 손이 닿기 전, 문득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너희 둘의 그림자가 겹치는 순간 길이 열려버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 모르기에 둘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 손을 닿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때였다.

공간 전체가 조용히 울렸다.
울림은 깊고 낮았으며, 심폐를 두들기는 맥박처럼 들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멈춰 섰다.

그리고 울림이 점점 커지자 마침내 그 형태가 나타났다.

앞쪽 공간이 갈라지며 한 장의 ‘벽’이 형성되었다.
벽은 돌로 보였지만 물처럼 흔들렸다.
그러다가 마치 화면이 켜지는 것처럼 벽 표면에 영상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기억이었다.

유라는 숨을 멈추었다.
벽 위에 희미한 영상이 흐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그림자들이 움직이는 정도였다.
검은 색과 회색이 뒤섞이며 어둠 속에서 인물의 형태를 만들어갔다.

그러다가 인물들의 윤곽이 점점 뚜렷해졌다.

두 소녀.
서로 비슷한 나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모습.
사진 속에서 유라가 보았던 장면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러나 사진보다 훨씬 생생했다.
그리고 사진에는 없던 것이 있었다.

영상 속 두 소녀는 서로를 껴안으며 이름을 불렀다.
유라가 들은 이름은 희미했지만 확실했다.

리세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른 목소리도 두 사람의 목소리였다.
어느 쪽이 어느 쪽을 부르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한 소녀에게도, 다른 소녀에게도 들릴 만큼 동일한 울림이었다.

유라는 한 걸음 물러났다.
리테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영상의 밝기는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장면이 나타났다.

두 소녀의 모습이 서로 겹쳐졌다.
몸의 선이 일치했고, 그림자가 겹쳤고, 표정이 동일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유라는 충격으로 숨이 막혔다.

마치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인 것처럼
마치 한 사람에서 두 사람이 갈라져 나온 듯한 모습

리테도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게… 누구야
둘이… 같은 얼굴이야

벽의 영상은 또렷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한 소녀가 다른 소녀를 부르는 모습이 나타났다.

리세
너는 절대 나를 잊지 않을 거야

그 말과 함께 화면이 갑자기 끊겼다.
마치 누군가가 강제로 전원을 꺼버린 듯한 단절.

유라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방금 전에 본 장면은 상상이나 꿈이 아니라, 실제 기억을 기록한 것 같은 생생함이었다.

그러나 영상은 끝이 아니었다.

벽 아래쪽에서 또 다른 흔들림이 생겨났다.
다른 기억이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영상이 아니라 목소리였다.

리세가 죽어버리면
대신 새로운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는 거야
기억은 도시가 결정하고
이름은 문이 결정하지

누군가의 무표정한 목소리.
그러나 그 목소리는 어딘가 이상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리테는 그 목소리가 방금까지 문 밖에 서 있던 남자의 목소리와 같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남자가 말하던 ‘기억을 먹는 문’
‘이름이 다시 만들어지는 도시’
그 말들의 의미가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유라는 손을 입에 갖다 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가 누군가의 기억이 잘려나간 상태라는 말이야
우리가 원래 한 사람이었어

리테는 고개를 저었지만 눈빛은 확신을 잃었다.

아니… 난 네가 누군지 몰라
너도 나를 모른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기억 속에서…
우리가 같은 사람처럼 보이는 거지

그때 벽이 다시 움직였다.
벽의 그림자가 천천히 모여 단어 하나를 만들었다.

리세

그리고 그 아래에 또 하나의 단어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둘의 이름은 아니다

유라는 숨을 멈추었다.
리테도 입술을 물었다.

둘의 이름은 아니다
그 말은 명확했다.

유라와 리테
두 사람 모두 리세가 아니다

남자가 말한 ‘같은 사람의 그림자’라는 표현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진짜 충격은 그 다음이었다.

벽이 또 다른 문장을 만들어냈다.

리세는 또 있다

순간 방 전체가 흔들렸다.
유라와 리테는 동시에 중심을 잃을 뻔했다.
공간 전체에서 낮고 깊은 울음 같은 소리가 울렸다.

리테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

또 있다고
그러면…
이 도시 어딘가에
또 다른… 우리가 있다는 말이야

유라는 목 속으로 삼킨 공기가 제대로 내려가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가슴이 답답했고, 공기가 무너지는 공간 안에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문 뜨건 너머의 기류가 더 세게 밀려왔다.
마치 누군가가 이 기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한 움직임.

리테가 유라를 보며 말했다.

앞으로 나가야 해
벽이 알려주는 건 시작일 뿐이야

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떨렸지만 고개는 분명히 끄덕여졌다.

둘은 나란히 벽을 지나
심연의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이름의 균열 속에서
잊혀진 리세의 잔상이
더 확실한 형태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