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아래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그림자는 마치 물결처럼 공간 위를 덮치려 했다.
검은 실들이 뭉쳐 만들어낸 덩어리는 생명체의 모습이라기보다, 감정이 갈라져 남은 어둠들이 서로 뒤엉켜 생긴 고통의 형상을 닮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갈라지는 목소리들이 하나같이 속삭이고 있었고, 그 속삭임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각각의 언어를 가진 기억들이 모여 울부짖는 소리였다.
유라는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숨을 쉬는 것마저 무섭고 힘들었다.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그림자는 단순한 공포를 넘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고통’까지 함께 끌어올리고 있었다.
리테 역시 뒤로 물러서며 손끝을 떨고 있었다.
어둠이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자신의 마음속에 감춰져 있던 그림자들이 한꺼번에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리세는 두 사람을 뒤로 감싸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작은 진동이 퍼졌다.
그 진동은 공간 전체에 퍼져 나가며 어둠을 잠시 눌렀다.
그러나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심연의 존재가 깨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시작된 움직임이었다.
리세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둘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지 않으면
저 존재는 멈추지 않아
둘 중 한 명을 데려가기 위해
기억의 쌍을 찾아 올라오는 거야
유라는 눈을 치켜뜬 채 물었다.
합쳐지면 살 수 있다는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이야
우리가… 다시 한 사람이 된다는 거야
리테는 곧바로 이어 물었다.
그럼 우리 중 한 명은 사라지는 거야
리세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 사이로 심연 아래에서 커지는 울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는 말했다.
사라지는 게 아니야
둘 다 남아
하지만 형태는 바뀌겠지
한 사람의 기억으로 돌아가면
빛과 그림자가 서로 만나
원래 모습을 찾게 되는 거야
유라와 리테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눈 속에서
두려움과 슬픔
분노와 혼란
모든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모든 설명이
어딘가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유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는
이전에도
이런 선택을 한 적이 있던 것 같아
리테는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우리가 계속해서 갈라지고
다시 합쳐지는 일을 반복해 온 것 같아
기억이 없어도
어딘가 깊은 곳에서
그런 느낌이 있어
리세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맞아
너희 둘은 처음 갈라진 게 아니야
기억 한 조각을 지킬 때마다
누군가의 이름을 잃을 때마다
심연은 하나를 갈라 두 개로 만들고
다시 둘을 하나로 되돌리기를 반복했어
이 도시에서
이 과정은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왔지
그 말은 너무 비극적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규칙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리테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럼 이 모든 일을 시작한 건
도대체 누구야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건데
리세의 눈빛은 어두워졌고
그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그 존재가 시작했지
기억을 먹는 존재
이름을 지우고
감정을 먹고
사람을 둘로 갈라
그 중 약한 쪽을 데리고 부서뜨리는 존재
유라는 무릎이 흔들리고 있었다.
리테는 팔을 감싸며 떨었다.
저 존재가
기억을 먹고
이름을 지우고
사람을 반으로 나누는 이유가 있어
리세는 엄청난 말을 털어놓으려고 하는 듯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심연 아래에서 또 한 번의 거대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검은 실들이
바닥 전체를 통해 튀어 오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단순한 탐색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를 향해
손을 뻗는 것 같은 움직임.
유라는 비명을 삼켰다.
리테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리세가 손을 뻗어 두 사람을 붙잡았다.
그는 외쳤다.
움직이지 마
저 존재는 움직임에 반응해
순간
검은 실 몇 가닥이 리세의 팔에 닿았다.
찰나의 순간
리세는 신음도 하지 않았지만
고통이 그의 눈빛을 스쳐 지나갔다.
검은 실들은 그의 몸 위로 미세하게 꿈틀거리며
그 안의 기억을 조금씩 훑고 있었다.
유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이건… 당신을 노리는 건 아니잖아
우리를
우릴 향한 거잖아
리세는 어둠 속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래
저 존재가 원하는 건
나야
그러나
나를 대신 삼킬 수 없으니
나를 갈라 만든
너희 둘을 먼저 데려가는 거지
리테가 숨을 멈췄다.
우리를 먼저…
리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존재는
나를 완전히 삼키지 못한 대신
내 조각들을 삼키려고 하는 거야
그게
너희 둘이야
심연 아래에서
또 한 번 울림이 터졌다.
검은 실들이 천천히 움직이며
유라와 리테를 향해 길게 뻗고 있었다.
리세는 두 사람을 뒤로 밀어냈다.
그리고 혼자 그 어둠 앞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오늘은
내가 너희를 대신해
그 존재 앞에 설게
하지만
언제까지 대신 설 수는 없어
리세는 단호하게 말했다.
둘이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순간
심연의 규칙이 바뀔 거야
리테가 떨며 물었다.
그럴 수 있다고
정말로
우리가 다시…
리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나로 돌아오면
저 존재가 너희를 선택하지 못하게 돼
왜냐하면
그 존재는 ‘둘’을 먹지
‘하나’는 먹을 수 없으니까
그 말은
이 도시에서 가장 금지된 진실처럼 느껴졌다.
유라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리테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리세의 눈빛은
이 모든 불가능 속에서도
한 줄기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다시 말했다.
그러니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해
너희 둘이
그래야만
살 수 있어
심연 아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더 크게 일렁였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본격적으로
그들을 향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