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18부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증거

심연 아래에서 치솟은 거대한 그림자는 단순히 ‘형체’라고 부를 수 없는 무언가였다.
그것은 움직임 자체가 감정이었고, 감정 하나하나가 독립된 생명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공포
슬픔
상실
분노
미련
그리고
지워진 이름들

그 모든 조각이 뒤엉켜 만들어진 그림자가 바닥 아래에서 솟구쳐 오르며 공간을 뒤덮으려 하고 있었다.
그 존재는 한 사람의 기억을 먹고 분리된 두 감정을 쫓는 존재.
빛과 그림자 중
먼저 흔들리는 쪽을 삼켜버리는 존재.

유라의 심장은 거의 고통에 가까운 맥박을 내고 있었다.
리테는 눈을 감으려 해도 감을 수 없을 만큼, 눈앞의 어둠이 몸 안쪽 깊은 곳을 잡아끄는 걸 느끼고 있었다.

리세는 두 사람을 뒤로 밀며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의 손은 이전보다 훨씬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검은 실들이 그의 팔을 스치듯 흘러 내릴 때마다
리세의 몸에서 기억의 조각 하나씩이 떨어져 나갔다.
그 조각들은 공기 중으로 사라지기도 전에
바닥 아래에서 올라오는 검은 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유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이대로 가면
당신까지…

리세는 유라의 말을 듣고도 몸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지만
그 아래에는 명백한 갈라짐이 있었다.

나야 괜찮아
여기까지 온 건
원래 내 선택이었어

리테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리세의 옆에서 뛰어나가려 했다.
그러나 리세가 순간적으로 팔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

안 돼
너희 둘은 떨어지면 안 돼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유라와 리테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우리는 떨어지면 안 되는 건데
왜 우리 둘을 붙잡는 건데
그리고
왜 당신은 혼자 맞서려는 건데

유라는 눈을 치켜뜨며 외쳤다.

왜 우리를 대신하려고 해
우리의 일부였다며
그렇다면
우리를 지키는 대신
함께 싸워야 하는 거 아니야

리세는 유라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미약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네가 빛이었던 거야

그 말은 적막 속에 깊이 가라앉았다.
유라의 마음 깊은 곳에서 잊고 있던 감정 하나가 전혀 다른 목소리로 떨렸다.

희망.

그리고
그 희망이 다시 무너지는 순간
바닥 아래에서 그림자가 한 덩어리 솟아올랐다.

더 기괴해졌고
더 커졌으며
이미 사람이라는 형태를 잊은 괴물의 덩어리였다.

그 그림자는 두 사람을 향해 갈라진 입처럼 생긴 틈을 벌렸다.
틈 안에서는 무수히 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잊어
잊어
잊어
이름을
감정을
기억을
잊어버려

그 목소리는 고통이 아니라
차라리 ‘명령’ 같았다.

유라는 그 소리에 몸이 굳어버렸다.
리테는 손을 귀에 가져갔지만
소리는 귀가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심연의 위쪽
두 사람의 뒤편에서
아주 부드러운 발걸음이 들렸다.

유라는 그 발걸음에 즉시 반응했다.
누군가가
계단 위쪽에서
조용히 내려오고 있었다.

리테는 눈을 치켜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작은 모습
가벼운 귀걸이가 흔들리며 반사한 빛
그리고 긴 코트를 입은 실루엣

유라는 숨을 멈췄다.

그 사람은
골목에서
폐허 식당에서
리테 앞에 나타났던 그 사내였다.

긴 코트의 그림자를 가진 사내.

그 사내는 천천히 계단 아래까지 내려왔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차분한 발걸음으로.

리세가 그의 모습을 보자
즉시 몸을 긴장시켰다.

너는…
왜 여기까지 온 거지

사내는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켜보고 있었지
처음부터
너희 모두를

그 말은 평범하게 들렸지만
그 안에는 숨겨진 진실이 담겨 있었다.

리테는 이미 숨이 차올랐다.

지켜봤다고
누구를
어디서부터

사내의 눈빛이 리테에게 향했다.


그리고 너희의 기억 속에서
갈라진 모든 조각들을

유라는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묘한 감정
공포도 아니고
위협도 아니었다.

그의 존재는
마치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감시자 혹은
관찰자처럼 느껴졌다.

리세가 낮게 말했다.

너는
심연의 존재와 연결된 자지
이 도시에서
기억의 규칙을 보고
기록하는 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이 도시에서 일어난 모든 분리를
지켜보는 역할을 맡고 있지
누군가가 쪼개질 때
누군가가 잊혀질 때
그리고 누군가가 다시 하나가 될 때도

리테는 손이 떨렸고
유라는 그의 말 속에 숨겨진 또 하나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었다.

그는
기억이 갈라지는 순간을
알고 있었다.

사내가 천천히 두 사람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너희 둘이 왜 갈라졌는지
왜 이 도시로 다시 돌아왔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은 거지

유라는 숨이 멎을 뻔했다.
그가 알고 있다
이 가장 깊은 질문을
이 도시의 정체를
심연 아래 움직이는 거대 그림자의 목적을
그리고
한 존재가 둘로 갈라진 이유를

사내는 두 사람 앞에서 멈췄다.
그의 눈빛에는
희미한, 그러나 명확한 감정이 있었다.

측은함.

그 감정은
유라와 리테의 마음을 찌르는 듯 했다.

사내는 말했다.

너희는
스스로 갈라진 게 아니야

유라는 눈을 크게 떴다.
리테는 손을 꽉 쥐었다.

사내는 아주 천천히 이어 말했다.

너희 둘은
누군가에게 의해
고의적으로
둘로 나눠진 거야

그 말은
이 심연 전체를 뒤흔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고의적으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둘을
갈라놓았다.

유라와 리테는 동시에 숨이 막혔다.

누구
도대체 누구 때문에
우리가

사내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답은
그 누구보다
리세를 향하고 있었다.

유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갈라놓은 사람이…

리테는 숨을 들이쉬었다.

리세…
너야…?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리세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 자체가
이미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심연 아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올라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형체를 드러냈다.

유라와 리테는
두려움 속에서 깨달았다.

지켜보고 있는 것은
저 사내만이 아니었다.

저 아래의 존재도
처음부터
모든 순간을
보고 있었다.

심연극장 전체가
한 사람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