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20부 리세를 추적하는 검은 의뢰

심연극장은 더 이상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하나의 생명체처럼 숨을 쉬고 있었고
세 사람, 유라, 리테, 리세의 그림자는
심연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또 다른 거대한 그림자와 겹쳐지며
하나의 무대처럼 얽혀 버리고 있었다.

사내의 외침.
그 존재는 ‘먹는 존재’가 아니라
기억을 빼앗는 ‘그림자의 주인’.

그 말은
심연을 뒤흔드는 진실이었다.

그림자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
사내는 단번에 리세를 향해 소리쳤다.

이제 숨길 수 없어
너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존재에게 ‘의뢰’를 받은 상태야

유라와 리테는 동시에 몸을 굳혔다.

의뢰.
그 말은
마치 이 도시에서 반복적으로 들려오던 기묘한 단어처럼
충격과 함께 깊은 울림을 남겼다.

리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벙긋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의 표정이 아니라
기억을 ‘숨기고 있던 사람’의 표정이었다.

유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의뢰라니…
무슨 의뢰를 받았다는 거야

리테는 숨을 들이쉬었다.

설마
우리와 관련된…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너희 둘을 갈라놓은 것도
기억을 찢어 두 개로 쪼갠 것도
이 도시로 다시 불러들인 것도
모두
그 존재에게서 받은 ‘검은 의뢰’ 때문이다

심장이 멎을 듯한 순간이었다.

유라의 가슴 속 깊이
작고 오래된 불씨 같은 감정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배신감
혼란
그리고…
이상한 낯섦.

리테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째서
왜 우리를 갈라놓을 의뢰를 받았어
그 존재는 왜 그런 걸 원한 거야

사내는 심연 아래에서 솟구치는 어둠을 피하며
세 사람 앞을 막아섰다.

그 이유는
너희 둘이
‘기억의 마지막 열쇠’였기 때문이다

유라는 이해하지 못했다.

열쇠…?
어떤 열쇠…?

사내는 답 대신
리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
그의 숨죽임.
그의 눈빛.

리세는 이 순간을 알고 있었다.
기억이 찢어지기 전부터
도시가 그를 돌려보내기 전부터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리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희 둘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려고 했어
정말로
그때는 다른 선택이 없었어

그러나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는
그 존재와 거래를 했지

유라와 리테는 동시에 리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숨겨져 있던 두려움이 드러났다.

사내가 말했다.

그 존재는
리세에게 하나의 선택을 내렸어
‘기억을 지키려면
두 감정을 갈라 시대를 버텨라’

그 존재가 원하는 것은
처음부터
유라와 리테가 둘로 나뉘는 것
하나의 기억을 완전히 먹어치우기 위해
먼저 감정을 약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으니까

유라의 눈이 커졌다.

감정을 약하게 만든다고…?
그러면…
우리가 떨어져 있었던 모든 시간은…

리테가 말을 이었다.

모두
그 존재가 원하는 그림이었다는 거야…?

그림자의 주인은
그림자를 먹지 않는다.
그는 감정을 먹는다.

유라가 몸을 떨며 말했다.

우리를
약하게 하려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고…?

사내는 대답했다.

그래
그 존재는
감정이 둘로 나뉜 순간을 기다렸다
둘 중 한 감정이 무너지는 순간
그 감정 전체를 삼키기 위해
의뢰를 걸었던 거지

리세는 두 손을 떨며 말했다.

나도…
그걸 알았어
너희가 상처 입는다는 것도
누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땐…
내가
그 존재에게 대항할 수 없었어

그의 고백은
심연 아래에서 울려오는 어둠만큼 무거웠다.

그러나 유라와 리테는
미묘하게 다른 반응을 보였다.

유라는 충격 속에서도
리세가 느꼈을 공포를 이해하려 했다.
자신이 빛이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감정이 살아 있으니까.

하지만 리테는 달랐다.
그녀의 눈빛은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상처를 더 크게 느낀다.
거짓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배신을 가장 깊게 받아들인다.

리테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우리를 갈라놓은 사람
우리를 혼자 버려둔 사람
우리를 지옥 같은 도시로 끌어온 사람

너였어…

그 말은 칼처럼 심장을 베었다.

리세는 다급하게 손을 내밀었다.

아니야
그건…
정말 그건…
너희를 지키려고…

하지만 리테의 몸에서
멈춰있던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림자 아래에서
울고 있는 마음
배신당한 아이의 마음
외롭게 버려진 기억의 파편들

그 모든 감정이 섞여
어둠이 깊게 깔리기 시작했다.

유라는 리테의 변화를 느끼고
즉시 손을 뻗어 막으려 했다.

안 돼
리테
너 지금…

그때
사내가 날카롭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림자의 감정이 흔들리면
저 존재가 바로 반응한다

그리고 정말로
심연 아래의 거대한 그림자가
리테 쪽으로 더 빠르게 기어오고 있었다.

유라는 외쳤다.

리테
정신 차려
제발

그러나 리테의 속삭임은
눈물보다 더 깊은 그림자 속에서 흘러나왔다.

나를
왜 갈라놓았어
나는
사라지는 쪽이었어…
그걸 알고 있었지…

리세는 절규했다.

그렇지 않아
정말 아니야
나는 너희 둘을
둘 다 지키고 싶었어

그러나 그 절규가 끝나기도 전에
심연 아래의 존재가
마침내
처음으로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공간이 갈라지고
어둠 속에서
커다란 얼굴처럼 보이는 형체가 나타났다.

눈처럼 보이는 두 개의 구멍
그러나 그 속에는 감정이 없었다
오직
기억을 먹고자 하는 욕망만 있었다

그 존재는
드디어
선택하려는 듯
두 그림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유라

리테
그림자

그리고
아주 천천히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라의 방향도
리테의 방향도 아닌

정확히
리세가 있는 방향으로.

유라가 빠르게 외쳤다.

안 돼
그 존재가 선택하려는 건…

리테는 숨을 멈추며 말했다.

우리 둘 중 하나가 아니야…

사내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래
지금 선택되는 건
‘원래의 감정’이다

그리고 리세는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래
나야
그 존재는
처음부터 나만
찾고 있었어

심연의 선택은
이미 내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