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23부 가짜 기억들이 서로를 물어뜯다

흰 도시의 중심, 안개가 부유하는 거리 가운데에서
기억의 생명체처럼 보이는 존재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발걸음은 소리 없이 땅에 닿았고
도시는 그를 ‘기억하는 듯’ 고요해졌다.

유라는 숨이 멎어버린 퍼즐의 조각처럼
자신의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그 존재는 실제 사람이 아닌
기억이 형체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너무나 선명했다.
누군가의 과거가
누군가의 절망이
누군가의 살아남은 흔적이
그 눈 속에서 빛도 없이 타고 있었다.

사내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저건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 버티며 살아남은 기억이다
먹히지 않기 위해
자신을 조각내어
형체를 만든 기억

리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억이…
형체를 만들 수 있다고…?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먹힌 기억은 도시가 되고
살아남은 기억은 형체가 되지
둘 다 비극이지만
둘 다 이 도시의 운명이다

그 존재가 유라 앞에 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뺨 가까이에 손끝을 멈췄다.

너는
열쇠다

그 말은 너무 갑작스럽고
너무 정확했다.

유라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열쇠라니…
무슨…

기억의 존재는 말을 끊고 유라의 가슴을 가리켰다.

너 안에는
네 것이 아닌 기억이 들어 있다

유라는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그녀가 이 도시에서 느끼던 모든 낯섦의 정체였다.

리테는 충격으로 몸을 떨었다.

유라에게
네 것이 아닌 기억이 있다고…?
그럼 그 기억은 누구의…

기억의 존재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기억은
너희 둘의 기억도 아니다

유라와 리테는 동시에 그 존재를 바라보았다.

그 존재는 그대로 이어 말했다.

그 기억은
원래
리세의 것이다

세 사람 사이의 공기가
한순간에 부서졌다.

유라는 귀를 의심했다.

리세의… 기억…?
그게 내 안에 있다고…?

리테 역시 충격에 숨을 들이켰다.

그럼
우리의 기억이 아니라
리세의 기억이
우리를 갈라놓은 거야…?

기억의 존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네가 가진 기억은
원래 리세의 감정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다
기억을 지키기 위해
너희 둘에게 나눠 넣어진 조각들

그 말은
리세의 모든 고백을
또 다른 방식으로 뒤집어 놓았다.

유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가 기억을 잃어버렸던 건
우리의 기억이 아니라
리세의 기억을
우리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 존재는 대답했다.

기억을 나누어 가진 자는
자신의 기억을 잃는다
대신
원래 주인의 기억을
대가처럼 품게 되지

리테는 얼굴을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
내가 느꼈던 두려움은
내 두려움이 아니라
리세의 두려움이었고
유라가 가진 희망도
유라의 것이 아니라
리세의 희망이었던 거야…?

기억의 존재는 고요하게 말했다.

그래
너희 둘은
리세의 감정을 나누어 가진 존재일 뿐이야
하나는 빛
하나는 그림자
그러나
둘 다
가짜 기억으로 만들어진 존재

유라는 눈을 크게 뜨며 흔들렸다.

우리가…
가짜…?

리테는 무릎이 흔들렸다.

우리가…
가짜라고…?

그 존재는 고개를 저었다.

살아 있는 가짜가 아니라
갈라진 진짜야
리세 한 사람의 기억이
둘로 갈라진 감정 조각에 깃들어
각각 다른 이름
다른 몸
다른 마음의 형체를 만들어낸 거지

그 말은
그들을 소멸시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말이었다.

리세는 그 말에 무너진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유라가 외쳤다.

미안하다고?
네가 우리에게 쏟아 넣은 그 기억들
그 기억 때문에
우린 우리가 누군지도 몰랐어
우린 우리 감정이 뭔지도 몰랐어

리테 역시 격하게 숨을 내쉬었다.

너는
우리가 너를 지킬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든 게 아니라
너 자신이 버티기 위해
우릴 만든 거였어

두 사람의 말은
정확하면서도 잔인했다.

그러나
기억의 존재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틀렸다

유라와 리테는 동시에 그 존재를 바라보았다.

기억의 존재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리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너희를 만든 게 아니다
그 존재에게 기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기억을
둘에게 나누어 준 거다

유라는 숨을 멈췄다.

리테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존재는 말했다.

리세는
자신이 사라지는 것보다
자신의 빛과 그림자가
각각 살아남기 바랐다
그래서 너희에게
자신의 진짜 감정을 맡긴 거야

리세의 감정

그림자

둘 다
그를 이루는 핵심이자
그의 진짜 심장이었다.

유라는 눈물이 맺혔다.

그럼…
우리는…

기억의 존재는 마지막으로 말했네.

너희 둘은
가짜가 아니라
리세의 살아남은 심장이다

그 말은
두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부순 동시에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정리되기 전
도시 전체가 흔들렸다.

안개가 갈라지고
하늘이 찢어지며
심연의 존재가
이 도시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쇄도하는 어둠 속에서
기억의 존재가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가짜 기억들이
서로 물어뜯기 시작한다
서둘러라
너희 둘이
하나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유라와 리테가
서로를 바라본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서
가짜 기억과 진짜 감정이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