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전체가 부서진 기억처럼 울리고 있었다.
깨진 창문 사이로 바람도 아닌 울음이 스며들었고
흰 안개는 더 짙어져
마치 누군가의 목소리를 숨기고 있는 듯했다.
유라와 리테는 여전히 서로의 손을 붙잡은 채
검은 형체가 남긴 마지막 말의 충격 속에 있었다.
진짜 기억만 남는다.
그 말은
둘 중 하나를 없애겠다는 뜻이기도 했고
둘 중 하나가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두 감정은 이미 뒤섞이기 시작했고
그 뒤섞임은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강력한 끌림이기도 했다.
그러나
진짜 기억을 결정하는 건
심연이 아니라
리세였다.
그 순간
기억의 존재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갑자기 빛처럼 가늘어졌다.
온다.
기억의 파동이다.
그러자
리세의 몸에서
미세한 빛이 번졌다.
유라가 놀라 외쳤다.
리세… 너…
리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몸에서 새어나온 빛은
‘기억이 돌아오려는 징조’였다.
그리고
그 기억은
리세가 오랫동안 숨겨온
마지막 기록이었다.
도시의 안개가 갑자기 갈라졌다.
흰 도시의 하늘이 열리고
거대한 검은 눈동자 같은 구멍이 생겼다.
그 안에서 심연의 존재가
조용히
그러나 치명적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억의 존재가 외쳤다.
시간이 없어
지금 리세에게 어떤 기억이 올라오는지
둘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 기억이
너희 둘의 진짜 모습을 결정해
그러나 리세는 고통에 몸을 움츠리며
바닥에 두 손을 박았다.
유라는 달려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리세
기억을 보여줘
우리가 무엇인지
네가 무엇인지
왜 우리가 갈라졌는지
이제 말해야 해
리테 역시 한 걸음 다가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이야
숨기지 마
넌 항상 우리에게서 숨었잖아
이제 그만 숨겨
리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어둠과 빛이 동시에 흔들리는
그 자체로 찢어진 기억이었다.
그때
도시는 다시 흔들렸다.
심연이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실들이 도시 곳곳에서 솟구쳐
건물 벽을 갈라내고
땅을 뒤틀었다.
그러자
리세의 몸에서 빛이 일제히 폭발했다.
그 빛은 도시 전체를 채우며
흰 안개를 밀어냈다.
그리고
빛이 완전히 퍼졌을 때
세 사람의 주변은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그곳은
집이었다.
낡은 벽지
작은 창문
책과 종이들이 쌓여 있는 좁은 방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하나의 오래된 일기장.
유라가 속삭였다.
여긴… 어디야…
리테도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낯설지 않아…
이 공간…
어디선가…
기억의 존재가 조용히 말했다.
여기는
리세가 사라진 밤의 기록이다
유라와 리테는 숨을 삼켰다.
리세는
그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지금의 그가 아니라
조금 더 젊고
조금 더 지친 모습이었다.
기억 속 리세는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을 떨며
일기장을 쓰고 있었다.
유라가 속삭였다.
저 사람이…
리세…?
리테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저건 우리를 갈라놓기 전 이야기야…
기억의 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리세가 너희를 갈라놓고
사라진 날이야
그때
기억 속 리세가
일기장에 적은 글이
공간 전체에 울리기 시작했다.
놔두면…
저 존재가
내 기억 전체를 먹어버려
그럼 아무도 남지 않는다
희망도
그림자도
모두 사라져
유라와 리테는
자신들의 이름이 아닌
‘희망’과 ‘그림자’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가슴이 크게 흔들렸다.
기억 속 리세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그래서
기억을 둘로 나눴다
희망은
내가 지키지 못한 모든 것을
다시 보게 해줄 감정
그림자는
내가 피하고 도망쳤던 모든 어둠을
대신 감당해 줄 감정
유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리테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기억 속 리세는
일기장 위에 손을 떨며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내가 사라져도
둘은 살아남아야 한다
둘 중 하나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그 말을 하자
기억 속 리세는 손을 놓았다.
바닥 아래에서
검은 실들이 솟구쳤다.
그 실들이
그의 몸을
기억을
감정을
둘로 찢어내듯 감싸기 시작했다.
유라와 리테는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그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만들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기억 속 리세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한 마디만 남겼다.
제발
살아남아 줘
그리고
그의 몸은
빛과 그림자로 찢어졌다.
찢어진 두 감정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며
유라와 리테의 형체를 만들었다.
기억은 끝났고
세 사람은 다시
흰 도시로 돌아왔다.
유라와 리테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리세도
말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도시의 하늘에서
심연의 존재가 내려오고 있었다.
완전히 깨달은 감정을 향해
마지막 선택을 요구하는 듯
검은 실들이
도시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사내가 외쳤다.
이제 결정해야 한다
너희 둘은
진짜 기억을 선택하든
하나로 합쳐지든
아니면—
여기서 모두 지워지든
흔들리는 도시 속에서
유라와 리테는
마침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은
알고 있었다.
이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진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