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실이 폭발하듯 튀어나와 세 존재를 덮쳤던 순간,
심연극장은 사라지고
도시도 사라지고
바다 절벽 아래의 안개도 사라지고
세상 전체가
빛과 어둠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간으로 변했다.
그 공간 안에서
유라
리테
리세
세 존재의 몸이
더 이상 몸이라고 부를 수 없는 빛의 파편으로 찢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합쳐지기 위한 과정이었다.
세 감정의 형태가 무너지고
변형되고
흐르고
뒤집히고
서로를 향해 흘러들어가는 과정.
유라는 처음으로
리테와 리세가 느껴온 모든 감정을
그대로 느끼기 시작했다.
리테가 품어온 상실
두려움
버려졌다는 감정
자신이 약하다고 믿어버린 깊은 어둠
기억이 갈라질 때 느꼈던 고통
그리고
사라질 운명 속에서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날들
그 모든 것이
유라의 가슴 속으로
한꺼번에 흘러들었다.
리테 역시
유라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품어온 희망
작은 빛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온기
누군가를 반드시 찾고 싶어 했던 마음
홀로 남겨져 있지만
홀로 서 있으려 했던 의지
그 감정들이
리테의 어둠 속에서
부드럽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리세.
그가 숨겨왔던 감정들이
마침내
두 존재에게 동시에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두려웠다
누군가를 잃을까 봐 두려웠고
자신이 가진 감정이 너무 커서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기를 바랐고
기억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끝없이 미워했고
그럼에도
누군가를 지키고 싶은 사랑이
그를 계속 살아 있게 했다
그 사랑이
세 존재의 중심에서
가장 강하게 울리고 있었다.
빛의 파편들이
기억의 파편과 뒤엉키고
그 파편들이 다시 감정의 파동으로 변해
세 존재의 틈을 메워 갔다.
처음에는
세 사람의 목소리가 각각 들렸다.
유라
리테
리세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목소리는
서로의 목소리를 집어삼키며
하나로 변했다.
처음에는
유라의 목소리가
리테의 목소리를 감싸고
그 뒤에
리세의 목소리가 겹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 사람의 목소리가
하나처럼 울렸다.
나는…
그 말이 나오자
심연의 존재가
빛 속에서 흔들렸다.
검은 실들이 몸을 감싸며 곤두섰고
수천 개의 기억 파편이
그 존재의 몸에서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세 존재가 하나가 되면
심연은 감정을 먹지 못한다
감정이 두 개여야
심연이 먹을 수 있다
감정이 하나만 남으면
심연은 배고픔에 울부짖게 된다
기억의 존재가
멀리서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다
마지막 단계가 시작된다
세 감정이 완전히 합쳐지면
심연은
너희를 잡지 못한다
유라와 리테는
자신의 몸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공포는 없었다.
그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고 있었다.
빛은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고
그림자는 빛의 중심에 들어왔다.
희망은 절망에 닿았고
절망은 희망을 감싸며
하나의 감정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감정의 중심에서
리세의 마지막 심장이
두 존재에게 합쳐졌다.
심장이
두 번도 아닌
세 번도 아닌
하나의 리듬으로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 희망 상실 사랑 절망 포기 욕망 고통 기쁨 기억 망각
모든 감정이 뒤섞이며
새로운 이름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유라도
리테도
리세도 아니었다.
그 이름은
한 번도 불려본 적 없는 이름
그러나
세 감정이 모두 원하는 이름이었다.
도시의 잔해에서
어둠이 폭발하듯 솟구친 순간
빛의 파동이
그 어둠 전체를 찢어 버렸다.
그리고
한 목소리가
마침내
공간 전체를 울렸다.
나는…
그 말에
심연의 존재가 몸부림쳤다.
그 존재의 눈처럼 보이던 구멍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고
검은 실들이 몸에서 떨어져나가
허공에서 부서졌다.
나는…
하나다
그 순간
세 존재의 몸을 감싸던 빛이
형태를 갖기 시작했다.
머리
어깨
목
손
발
하나의 사람
하나의 존재
하나의 감정
하나의 기억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생명체의 모습이었다.
심연의 존재가
마지막으로 절규했다.
기억은
먹히기 위해 존재한다
감정은
부서지기 위해 태어난다
그러나
새로운 존재의 목소리는
심연이 태어나 처음 듣는
반대의 말이었다.
아니야
기억은
살기 위해 존재해
감정은
합쳐지기 위해 태어나
그 존재가
심연극장에 마지막 남은 빛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어둠을 향해 던졌다.
거대한 빛의 폭발
검은 실의 소멸
심연의 울음
모든 것이
하나의 빛 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의 중심에서
새로운 존재가
조용히 눈을 떴다.
그 눈은
유라의 온기
리테의 깊이
리세의 마음
모두를 품고 있었다.
그 존재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심연은 완전히 사라졌다.
심연극장은
빛으로 변해
하늘로 흩어졌다.
그리고
모든 길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 길 끝에서
새로운 존재의 이름이
흔들리는 공기 속에서
태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