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늦봄의 인천은 유난히 습기가 많았다
계절이 여름으로 기울어가는 길목에 서 있던 그 해의 바람은 바닷가 비린내를 머금고 언덕골목을 천천히 오르내렸고
그 바람 속에서 오래된 벽돌집들은 한숨을 토하듯 낡은 기와를 흔들었다
그날 아침 언덕 아래로부터 차 한 대가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춰섰고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허리를 세우며 문을 열었을 때
한서이는 물컵을 들고 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보다가 조용히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차를 바라보았다
빨간 벽돌집 3층은 원래 두 집이 나란히 붙어 있는 구조였고
서이가 남편 오민석과 함께 살아갈 집은 복도 오른쪽
복도 왼쪽 집은 몇 날 며칠 동안 비어 있었다
이웃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아무도 살지 않는 집 옆에서 생활하는 것은 묘하게 허전했다
그래서 서이는 새로 올 사람이 누구일지 조금은 궁금했다
이삿짐 트럭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사람은
서이보다 조금 더 젊어 보이는 남자였다
등에는 라디오 방송국 로고가 찍힌 바람막이 하나가 걸쳐 있었고
바람막이 안쪽 셔츠는 아직 구겨진 자국이 남아 있어 새로 산 듯했다
그는 시간을 아껴 쓰는 사람처럼 보였다
박스를 옮기면서도 가끔 팔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곤 했고
짐을 올리는 와중에도 종종 라디오 원고 같은 종이를 꺼내 훑어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게 소문으로만 듣던 야간 작가의 모습인지
아니면 그냥 성격인지
서이는 알지 못했다
자동차 문이 반대쪽에서 열리고
그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내렸다
깔끔한 단발머리에 다소 피곤해 보이는 얼굴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눈
하지만 가벼운 몸짓에서 몸에 밴 직업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늘 시간에 쫓겨 움직이는 사람의 걸음
늘 누구에게 전화가 올까 긴장하고 있는 사람의 어깨
서이는 그것만으로도 그 여자가 공항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았다
언덕 아래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장우진씨 짐 위로 올립니까
그 남자
그러니까 새 이웃 장우진은 대답 대신 짧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말수가 적고
필요한 내용만 말하는 듯했다
서이는 베란다 창문을 닫고
다시 작은 부엌으로 들어가 컵을 씻었다
민석은 오늘도 새벽 첫 비행기로 싱가포르로 출장을 떠났다
부엌 벽에 걸린 달력에는 그가 집에 없는 날들에 표시된 동그라미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서이는 손목에 물을 튀기며 그 달력을 본 뒤
가만히 한숨을 삼켰다
남편과 이런 식으로 멀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결혼을 하던 날 그녀는
행복이라는 것이 손에 잡히는 형태를 가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의 행복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바람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잡을 수는 있으나 오래 쥐고 있지는 못하는 것
문득
현관문 너머 계단에서 들리는 남자의 발소리를 듣고
서이는 고개를 들었다
장우진이 짐을 잠시 내려두고 계단 난간에 팔을 걸치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서이는 잠시 망설였지만
예의상 문을 열고 인사를 건넸다
새로 오셨어요
장우진은 놀란 듯 서이를 바라봤다
하지만 금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옆집에 살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그리고 이상하게 안정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밤마다 라디오 앞에서 말할 때도 이런 목소리일지
서이는 잠시 상상했다
그가 다시 계단을 내려가고
서이는 문을 닫으려다가
계단 아래에서 들리는 낯선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또 하나의 짐차가 언덕 아래로 올라왔다
이번엔 복도 오른쪽
서이가 이사 온 집으로 들어오는 짐이었다
남편 오민석이 일하는 무역 회사에서 보내준 짐들
출장과 숙박을 반복하며 모은 기념품들이 담긴 상자들
그리고 딱 한 번
서이를 위해 샀다고 말했던 초록색 스카프가 있는 작은 상자
서이는 스카프를 펼쳐보았다
부슬비 내리는 봄날에 어울리는 밝은 초록색
그러나 스카프를 손끝으로 만지며
서이는 알 수 없는 냉기를 느꼈다
새 이웃들은 아직 정리 중이었다
왼쪽 집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상자의 마찰 소리
문짝을 여닫는 소리
라디오의 작은 음악 소리
그리고 가끔
누군가의 억눌린 한숨 같은 소리
그날 밤
서이는 좁은 부엌 테이블에 앉아
뜨거운 물에 티백을 넣으며
라디오를 켰다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도심보다 항구가 더 조용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집에 혼자 있는 분들
창문을 열어두면
바닷바람이 조금 들어올 거예요
서이는 그 목소리가
얼마 전 계단에서 만난 사람의 것이라는 걸
단번에 알았다
장우진
그는 라디오를 읽을 때
조용히 속삭이는 사람 같았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
틈을 내주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말하는 사람 같았다
서이는 컵을 들고 창가로 걸어갔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골목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빗방울 몇 개가 가로등 아래에서 빛났다
유난히 조용한 밤이었다
두 집이 동시에 이사 온 첫날
골목은 어떤 큰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의 평범한 시작은
서이도
우진도
아직 알지 못한 채
어느 길의 첫 장면이 되고 있었다
그 길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곳으로
그들을 데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