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4부 각자의 결혼이 조금씩 어긋나던 때

언덕마을의 아침은 늘 같은 소리로 시작되었다
빨래를 터는 소리
옆집 문이 열리는 소리
출근하는 아저씨들의 가벼운 발걸음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
그 익숙한 소리들 사이에서
서이와 우진의 삶은 조금씩
겁나게 작은 틈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서이는 출근 준비를 하며 부엌 테이블에 앉았다
서랍에서 남편이 준 초록색 스카프를 꺼내 목에 천천히 두르는 동안
얼마 전 분식집에서 우진과 마주쳤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조용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었고
서이는 그 말투를 몇 번이고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밀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남편이 집에 없는 날이 더 많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녀는 아직 결혼이라는 틀 안에 자신을 묶어두려 했다
문득
스카프 끝을 잡아당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니다
지친 것뿐이야
지친 날엔 누구라도 옆에 있는 사람이 눈에 띄는 법이지

그 말은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는 마음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스카프를 매는 손끝은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같은 시각
옆집 장우진은 깨어나자마자
식탁 위에 놓인 남겨진 반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 지현은 새벽 비행 스케줄 때문에 일찍 집을 나섰고
집 안에는 우진 혼자 남았다
식탁 위에는 지현이 남긴 메모가 있었다

내일은 야간 교육이라 늦어
저녁은 따로 먹어
잘 다녀와

내용은 늘 같았고
표현도 늘 같았다
정확하고 실용적인 말
그러나 따뜻한 말은 늘 없었다

우진은 메모를 접어 쓰레기통에 버리며
어떤 감정인지 모르는 감정을 느꼈다
서운함인지
외로움인지
아니면 포기인지
그것도 아니면
익숙함일지도 몰랐다

그는 남은 식탁을 손으로 문지르며 생각했다

결혼이란 건
서로의 옆에 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멀리 떨어져서 기다리는 일에 가까운 것인지도

우진은 라디오 원고 가방을 들고
출근 준비를 했다
그날따라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유난히 서늘했다

서이는 회사에서 고객 상담을 하며
어제의 미묘한 감정들을 다시 떠올렸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모두 그녀의 감정에서 아주 멀리 있는 사람들 같았다
남편의 출장 일정은 이번에도 길어진다는 연락이 왔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남편의 목소리는
어딘가 멀리 떨어진 먼 나라의 사람 목소리 같았다

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네 알겠어 라고 말하고
종이를 정리하며 일상을 이어가는 척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끝은 자꾸만 흔들렸다

점심시간
직장 동료인 윤미가 물었다

요즘 얼굴이 안 좋아
남편 출장 때문이야

서이는 허겁지겁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별일 없어
그냥 일이 좀 많아서 그래

그러나 윤미는 오래된 친구처럼
그 웃음 속에서 무너지는 모래성을 본 듯
말없이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한편
우진도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라디오 방송국의 회의실에서
프로듀서와 작가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지만
우진의 시선은 회의 자료가 아닌
창밖의 흐린 하늘에 멈춰 있었다

PD가 물었다

이번 분기에는 새로운 코너를 하나 더 넣을까 하는데
우진씨 생각은 어때요

우진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아 네
좋을 것 같습니다

PD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은 묘했다
우진은 자기의 대답이 너무 자동적으로 나온 것을 알고 있었다

밤에 틀어놓는 라디오 원고는
요즘 지친 마음을 억지로 끌고 쓰는 글이 되어가고 있었다
말들이 살아 있지 않았다
감정이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언덕 위 두 집의 결혼 생활은
표면적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두 집 다 조용했고
두 집 다 깨끗했다
두 집 다 밝은 불빛 아래에서
서로에게 적당한 말을 건네며 하루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서로의 마음에서
조금씩 먼지를 쌓아가고 있었다

집이란
가끔은 오래된 책장처럼
겉은 멀쩡해도
속은 썩어 들어가는 법이었다

그날 저녁
서이는 일찍 퇴근했다
밖에는 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쓴 채 골목을 내려가다가
문득
분식집으로 향하지 않고
반대로 위쪽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곧바로 올라가면
오늘도 똑같은 침묵 속에 갇힐 거라는 걸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위로 올라간 곳은
우진이 사는 집 문 앞도
자신의 집 문 앞도 아니었다

그 중간쯤
지붕이 가려주는 작은 계단 포구
언제나 비가 조금 덜 오는 자리
그곳에 서서
서이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계단 아래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그리고 익숙하게

장우진이었다

그는 서이를 보며 놀란 듯 멈췄다
하지만 이내 짧게 웃었다

비 피하시는 거예요

서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냥
잠깐 서 있었어요

둘 사이를 흐르는 공기는
지난번보다 조금 더 가까워져 있었다
비는 계속 세게 내리고 있었고
계단 아래에서 올라오는 물소리가
마치 둘만의 대화를 대신하는 듯 했다

우진은 조심히 말을 꺼냈다

저는
비 오는 날이 좋아요
사람들이 조용해지고
집들도 조용해지고
그런 날엔
마음이 조금 정직해지는 것 같아서요

서이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 말은
서이가 평소에 느끼던 말과 닮아 있었다
우연이었지만
우연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서이는 입술을 조금 열었다

비 오는 날엔
사람이 혼자인 게 더 잘 느껴져요
그러면서도
누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조금 더 진짜처럼 느껴지죠

우진은 그녀의 말을 듣고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에는
동의
슬픔
이해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아주 짧게
그가 말했다

알아요
저도 그래요

그 말은
대단한 고백이나 감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서이의 마음을
가장 깊은 곳에서 건드리는 말이었다

비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두 사람은 계단 포구 좁은 공간에서
비도 피하고
마음도 피하지 못한 채
잠시 같은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순간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지만
둘 사이의 공기가
조금 더 따뜻해졌다

그리고 서이는 알았다

자신의 결혼이
어디선가
서서히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진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결혼이
이미 오래전에
깨진 틈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그 틈은
비 오는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더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