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진은 터미널에서 본 예약 명단의 충격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언덕마을의 계단을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마음 안에서 내리는 비는 멈춘 적이 없었다
계단을 오르며
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을 떠올렸다
언젠가부터
지현과의 대화는 짧아지고
감정은 얇아지고
밤이 깊어져도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아내는 피곤하다는 말로 모든 걸 덮어두었고
우진은 그 말 뒤에 숨은 감정을 끝까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들의 결혼은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향한 질문을 잃어버렸다
그 질문 하나가 사라지자
관심도 사라졌고
그 관심이 사라지자
사랑도 서서히 식어갔다
언덕 꼭대기에서
그는 고개를 들어
서이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마치 불빛이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
창문 위 커튼 사이로 은은한 조명이 새고 있었다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있던 서이는
우진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서이는 그에게서
평소와 다른 무게를 느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표정에서 모든 감정이 읽혔다
그녀는 컵을 내려놓고
거울을 잠시 보았다
눈가에 피곤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림자 너머로
자신도 똑같은 감정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었다
잠시 후
서이는 우산도 들지 않은 채
문을 나섰다
바람은 없었지만
밤의 공기는 차가웠고
골목에는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계단 아래에서
우진이 천천히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들고
서이를 보자
걸음을 멈췄다
둘 사이에는
몇 걸음 거리
그러나 그 거리는
마음속에서는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서이가 먼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우진씨
너무 늦게 오셨어요
그 말에는 따뜻한 걱정도
살짝 숨겨진 놀람도 있었다
그러나 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서이를 바라보는 눈빛만으로
오늘 겪은 모든 일이 자신의 어깨 위에 무겁게 놓여 있음을 드러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우진은 낮게 말했다
혹시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서이는 그 말이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지금 가장 필요한 구조 요청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둘은 목욕탕 간판 아래 작은 비가림 포구에 나란히 섰다
바람이 살짝 있었다
그 바람 속에서
서이는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우진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천천히 말했다
터미널에서
내일 출항하는 선박 예약 명단을 봤어요
그리고…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서이는 기다렸다
그가 말할 때까지
침묵도 서로의 감정이었다
우진은 결국 말했다
지현이…
당신 남편과 이름이
같은 명단에 있었어요
그 말은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서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듯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말은
마음을 꿰뚫는 충격이라기보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 느낌에 가까웠다
초록 스카프
늘 비어 있던 저녁
바빠서 못 왔다던 약속들
그리고
점점 더 얇아지는 남편의 말투
그 모든 것들이
오늘 단단하게 맞춰졌다
서이는 작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저도
알고 있었어요
우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스카프 때문인가요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스카프…
지현씨가 가진 것과 같은 걸 봤어요
모르고 산 게 아니라는 걸
느꼈어요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분노보다 슬픔이
실망보다 외로움이
그리고 배신감보다
이해가 더 깊게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온전히 읽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둘 다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둘은 비가림 포구 아래 그대로 앉았다
계단에 앉은 채
저 멀리 항구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그 불빛은 흔들렸지만
두 사람의 침묵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안정되어 있었다
우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무섭지 않아요
이런 이야기
누군가와 나누는 거
서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누구보다…
당신이라서 괜찮아요
그 말은
서이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 말이었다
우진은 그 말을 들으며
가슴이 아팠다
아프면서도
따뜻했다
그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는 말했다
우리
비슷하죠
많이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똑같이
버려진 느낌이네요
같은 자리에서
두 사람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상처를
오늘 처음으로 말할 수 있었고
그 상처를 들은 사람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
같은 고통을 가진 사람
같은 불안을 가진 사람
그 관계는
친구보다
이웃보다
더 가깝고
더 낯설며
더 위험한 형태였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 밤
이 대화
이 고백은
서로의 삶에서
아주 깊은 곳에 파문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파문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언덕 아래 항구의 불빛은
밤바람에 흔들렸고
둘의 그림자는
아주 천천히
서로의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같은 상처를 가진 이웃
그들은 이제
서로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