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8부 밤골목에서 시작된 긴 대화

밤은 깊어가고 있었지만
언덕마을은 여전히 조용했다
가로등에 비친 벌레의 그림자만이 벽에 아른거렸고
멀리 항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조차
오늘따라 무기력하게 퍼져나갔다

비가 오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마음에는
여전히 스며드는 습기가 남아 있었다
서이와 우진은 계단 아래 비가림 포구에 나란히 앉아
잠시 말을 잃은 채
서서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어색함을 넘어서는
묵직한 공감에 가까웠다
서로의 상처를 마주한 후
그 상처를 처음으로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은
그들을 조용히 연결시키고 있었다

서이가 먼저 입술을 열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이런… 느낌들
불안함하고
그리고…
이상하게
혼자인 것 같은 기분

우진은 손가락으로 계단 가장자리를 천천히 긁으며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마
말을 안 했던 날부터였겠죠
사과 대신 침묵을 보내고
약속 대신 변명을 보내고
웃음 대신 한숨을 보내던 날부터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오랜 시간 혼자 견뎌왔던 사람의 무게가 묻어 있었다

서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저도요
남편이 늘 출장 간다고 말하면서
언제부터인지
저한테 아무 설명도 안 하게 됐어요
처음엔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저를…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던 거겠죠

그녀는 말 끝에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숨이 턱 막힌 듯한 느낌
말로 꺼내면 더 아픈 그 감정

우진은 그녀를 바라보며
작고 부서지는 우수 섞인 표정을 읽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어느 날
지현이 주고 간 그 만년필을 봤을 때
그게 그냥 선물 같지가 않았어요
그리고
그걸 당신 남편이 쓴 걸 본 적이 있어요
너무 똑같은 모델이라서
한눈에 알아봤죠

그 말에
서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들 각자의 배우자가
어디서
언제
어떻게
서서히 마음을 떼어낸 것인지
지금 이 순간
모두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서이는 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끼리 뭔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런 걸 우리가 견뎌야 해요

우진은 대답 대신
서이의 어깨 너머 밤하늘을 잠시 바라보았다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구름만이 천천히 움직이며
밤의 흐름을 바꿔놓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혼을 강요한 것도 아니고
떠나라 한 것도 아니니까요
결혼이란 게
누가 버티느냐의 문제니까

말은 담담했지만
그 목소리 깊은 곳에는
깊은 체념이 숨어 있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침묵은
불편함이 아니라
서로의 감정을 조용히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서이는 한참 뒤
천천히 몸을 돌려 우진을 바라봤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옆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평소처럼 차분하지만
그 안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슬픔이 있었다

서이는 조심스레 말했다

오늘…
힘들었겠어요
그 명단
보셨다면서

우진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더는 숨기지 않기로 한 듯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힘들었어요
정말
믿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오타이길 바랐고
잘못 본 거길 바랐는데
아무리 다시 봐도
그 두 이름이
같은 줄에 있었어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깊게 흔들렸다
마치 꺼내기 힘든 상처를
오랜만에 공기로 꺼낸 사람의 목소리처럼

서이는 눈을 내리 깔았다

저도
비슷했어요
스카프를 봤을 때
똑같은 스카프가
당신 아내 옷장에서 보였을 때
제 심장도
잠깐 멈춘 것 같았어요
근데
이상하게도 충격이라기보다
‘아
역시 그랬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같은 순간
같은 감정
그러나 서로 다른 장소에서 겪었던 진실

그 모든 조각들이
지금
밤골목에서 하나의 큰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남편분이
그 사람과 일본에 간 적도 있을까요

서이는 조금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아요

우진은 숨을 잠시 골랐다
그리고 말했다

지현이
친정에 가서
아픈 어머니를 돌본다고 했는데
편지에 붙은 우표가
일본이었어요

서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장이 크게 두어 번 뛰었다

남편도요
출장이라며 보낸 영수증에
호텔 주소가 일본이었어요

두 사람이
같은 시간
같은 도시에서
같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

서이와 우진은
그 사실을
오늘 밤에서야
완전히 확인했다

더 이상
부정할 것도
눈 감을 것도 없었다

서이는 갑자기
참기 어려운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울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 앞에서 울면
더 가까워질 것 같아서
더 위험해질 것 같아서

우진은 그 눈빛을 보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말은 조심히 꺼냈다

우리
이렇게
같은 상처를 나누는 거
괜찮을까요

그 말은
경계이자
유혹이었다
둘 다 알고 있었다
이렇게 서로에게 기댈수록
이미 되돌아가기 힘든 곳까지 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서이는 고개를 떨군 채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은…
괜찮아요
누군가라도
제 마음 알아주는 사람이
필요했어요
오늘은…
정말로

그 순간
우진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손은 떨리고 있었고
입술도 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흔들림마저
너무 진솔하고
아팠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저도요
오늘은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어요

밤골목은
두 사람을 에워싸며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계단 위

그곳에서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서로에게
조용히 기대기 시작했다

아직 손을 잡은 것도
서로에게 다가간 것도 아니었지만

마음의 모서리가
서로에게 닿기 시작한 순간

위험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험은
둘 모두에게
처음으로 따뜻하게 느껴지는 위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