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3부 소문이 언덕을 타고 올라오는 속도

언덕마을의 소문은
비보다 빨리 번졌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벽을 타고
계단을 타고
사람들의 말끝을 타고
조용히 위로 위로 올라왔다

서이는 어느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다가
문득 복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집주인 할머니와 아래층 아주머니의 대화였다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말들은
의도하지 않아도 귀에 꽂혔다

요즘 저 집
밤마다 불 켜져 있더라
혼자 사는 것도 아닌데

젊은 사람들 사는 집이 다 그런 거지 뭐
근데
좀 자주 늦긴 하더라

그 말은
특정 이름을 부르지 않았지만
서이는 그 말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았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신발끈을 묶는 척하며
말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문이 닫히고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 뒤에야
비로소 허리를 폈다

거울 속의 얼굴은
생각보다 차분해 보였다
그러나
그 차분함 아래에는
긴장과 불안이 얇게 겹쳐 있었다

서이는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문을 닫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누군가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이유 없는 감각
그 감각이
이제는 이유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날 회사에서도
서이는 평소보다 더 말을 아꼈다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
윤미가 물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요즘
집에 일 많아
자주 늦게 들어간다면서

서이는 순간
손끝이 굳었다
그러나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남편 출장도 잦고
집에 혼자 있으니까
좀 늦어도 괜찮아서

그 말은
사실이면서도
사실이 아니었다

윤미는 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묻고 싶은 질문이 남아 있었다

서이는 그 눈빛을 피하며
식판을 정리했다
회사라는 공간에서도
자신의 삶이
조금씩 투명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진 역시
비슷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방송국에서는
요즘 우진이 자주 멍하니 있다는 말이
작은 농담처럼 오가고 있었다


요즘 왜 이렇게 말수가 없어
연애하냐

누군가 웃으며 던진 말에
우진은 웃음으로 넘겼다

아니에요
그냥 잠을 좀 못 자서요

그러나
그 말이 끝난 뒤에도
그 농담은 그의 귀에 오래 남았다

연애
그 단어는
그가 애써 피하고 있던 단어였다

집에 돌아오는 길
우진은 언덕 아래 분식집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
익숙한 냄새
익숙한 불빛

그러나 그는
들어가지 않았다
요즘은
그곳에 가는 것조차
누군가의 눈에 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여인숙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305호는
그들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였지만
그 안전함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우진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
305호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에서
비슷한 피로를 읽었다

오늘
조금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서이가 먼저 말했다


저도요

우진은 대본을 펼치며
말을 이어갔다

회사에서
괜한 농담을 들었어요
연애하냐고

서이는 손을 멈췄다

뭐라고 하셨어요

그냥 웃고 넘겼죠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쪽이 서늘해졌다

우리는
조심해야 해요

그녀의 말은
부탁이자
경고였다

우진은 대본에서 시선을 떼고
서이를 바라보았다

알아요
그래서
여기서만 만나는 거잖아요

그러나
그 말은
어제보다 덜 확신에 차 있었다

그날 대본 작업은
유난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서이는 문장을 고치다 말고
자꾸만 멈췄고
우진 역시
펜을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마음이
이야기보다 앞서 나가고 있었다

서이는 결국
연필을 내려놓고 말했다

우진씨
혹시
이렇게 계속 가면
우리
어디까지 갈 것 같아요

그 질문은
조심스럽게 던졌지만
날카로웠다

우진은 한참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요
다만
지금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
멈출 수 없게 될 것 같다는 건
알겠어요

그 말에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두 사람은
같은 두려움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날 밤
305호를 나서며
계단 아래에서
낯선 기척을 느꼈다

아래층에서
누군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여인숙 주인의 친척쯤 되어 보이는 남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길지 않았지만
충분히 날카로웠다

서이는 순간
몸이 굳었다
우진은 그녀보다 먼저
한 발 앞서 걸으며 말했다

먼저 가세요
제가 불 끄고 갈게요

그 말은
자연스러웠지만
의도적이었다

서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끝까지 따라오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서이는
문을 닫자마자
벽에 등을 기댔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미
무언가가 시작된 것 같았다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기류였다

사람들의 눈
사람들의 말
그리고
자신의 마음

모든 것이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며칠 뒤
서이는 집주인 할머니에게
불려갔다

할머니는
차를 한 잔 따라주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요즘
너무 늦게 다니는 것 같아서
걱정돼서 말이야

그 말은
충고였지만
경고에 더 가까웠다

서이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조심할게요

그 말은
약속이 아니라
버티겠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그날 밤
서이는 305호로 가지 않았다

우진에게
오늘은 쉬자고
짧은 메모만 남겼다

우진은 그 메모를 보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떨어져 있는 밤을
견뎠다

언덕마을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 속에서
소문은
이미 충분히
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아직
말의 형태를 갖추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의 삶을
정확히 겨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