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5부 다시 마주친 계단의 온도

그날 저녁
서이는 퇴근 시간이 평소보다 조금 늦어졌다
회사에서 잡무가 길어졌고
집중하려 해도 자꾸만 마음이 흐트러졌다
시계를 볼 때마다
언덕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떠올랐고
그 계단 끝에 있는 여인숙의 불빛이 떠올랐다

서이는 가방을 들고 회사 문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길
늘 하던 선택과는 다르게
그녀는 분식집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의도적인 선택이라기보다
몸이 먼저 기억해낸 길이었다

분식집 앞에 섰을 때
안에서는 평소처럼 사람들이 떠들고 있었고
라면 냄새가 골목으로 흘러나왔다
서이는 문을 열지 않은 채
잠시 서 있었다

들어가면
우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두 가지가
같은 무게로 그녀의 마음을 붙잡았다

결국
그녀는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 길을 지나
여인숙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305호에 가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저
그 앞까지
한번만 가보자는 생각이었다

우진은 그날
305호에 가지 않았다
며칠 동안 계속 이어진 혼자만의 대본 작업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있었다

서이가 없는 글은
문장이 맞아도
숨이 없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언덕 아래에서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들어
서이의 집 쪽을 바라보았다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그 사실에
가슴이 이상하게 내려앉았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일인데
지금은
그 불 하나가
그녀의 안부처럼 느껴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여인숙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곳에 가면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고
괜히 더 허전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리기에는
오늘의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여인숙 계단 아래
서이는 걸음을 멈췄다
305호까지 올라갈 용기는 없었지만
이곳에서 돌아서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그녀는 몸을 굳혔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을 때
우진이 서 있었다

둘은
그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다시 마주쳤다

서이는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고
우진 역시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계단 아래의 공기는
묘하게 따뜻했다
낮 동안 데워진 벽과
밤공기가 섞여
기억 속의 온도처럼 느껴졌다

우진이 먼저
아주 낮게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그 짧은 대화 사이에
말하지 않은 시간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왜 안 왔는지
왜 연락하지 않았는지
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

그 모든 질문이
둘 사이에 서 있었지만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우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괜찮으면
잠깐만
걸을래요

서이는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끄덕였다

둘은 여인숙을 등지고
언덕 아래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나란히 걷되
서로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
의식적으로 유지한 거리였다

몇 걸음 걷다가
서이가 말했다

며칠
일이 좀 있어서요

우진은 그 말이
완전한 설명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 대답에는
서운함도
책망도 없었다

그 점이
서이를 더 힘들게 했다

골목 끝에서
둘은 다시 멈춰 섰다

서이는 손가락을 꼭 쥐며 말했다

우진씨

잠깐
거리 두고 싶었어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래야 했을 거예요

그의 대답은
너무 담담해서
서이는 순간
눈이 시큰해졌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힘들더라고요

그 말은
조심스러웠지만
솔직했다

우진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저도요

그 한마디는
설명도
변명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상태에 있다는 고백이었다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예전과 달랐다

피하려던 마음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침묵이었다

서이는 고개를 들었다

우리
다시
305호에서
쓰는 건
아직
너무 위험하겠죠

우진은 잠시 생각했다


아직은요

그 말에
서이는 안도하면서도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면
오늘은
그냥
이렇게만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했지만
우진은 이해했다

그냥
이렇게
같이 서 있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괜찮아요

둘은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고
서로에게서 완전히 돌아서지도 않은 채

그 거리
그 온도
그 침묵

그 모든 것이
다시 시작을 알리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헤어질 시간이 되었을 때
서이는 먼저 말했다

오늘
고마워요

우진은 조용히 웃었다

저도요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우진은 끝까지 바라보지 않았다
바라보면
붙잡고 싶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이는 집에 들어와
문을 닫고
한참을 서 있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사라졌던 저녁들
멀어졌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이
오늘 계단 아래에서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알았다

이 만남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이었다

더 조심스러운
더 깊은
그리고
더 어려운 시작

계단의 온도는
여전히
따뜻하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