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7부 선택하지 않은 선택들이 밤을 채운다

그날 이후
서이와 우진은
서로를 더 자주 떠올리게 되었지만
의도적으로
만나는 횟수는 줄였다
마주치지 않기 위해
조금 더 빨리 집에 들어가고
조금 더 늦게 출근했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은 선택들은
밤이 될수록
더 크게 마음을 채웠다

서이는 퇴근 후
집에 들어와 불을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남편에게서
또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이번 주도 돌아가기 어렵다는 말
회의가 길어졌다는 말
늘 그렇듯
사과는 짧았고
설명은 없었다

서이는 메시지를 읽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이제는
의심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비어 있는 자리만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 빈자리에
우진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졌다

그의 목소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말들
계단 아래에서 나눴던
짧고 조심스러운 대화

서이는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선택하지 않았던 수많은 선택들이
머릿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그날
305호로 올라갔더라면
그날
그를 붙잡았더라면
그날
조금 더 솔직했더라면

그러나
그 모든 선택은
이미 지나간 것이었다

우진도 비슷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돌아온 그는
라디오를 켜 두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원고는 이미 제출했지만
마음은
전혀 정리되지 않았다

그는 노트를 펼쳤다가
다시 덮기를 반복했다
글을 쓰면
서이가 떠올랐고
쓰지 않으면
더 선명해졌다

그는 결국
연필을 들고
아무 제목도 없는 문장을 적었다

사람은
선택한 일보다
선택하지 않은 일 때문에
더 오래 흔들린다

그 문장을 적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노트를 덮었다

그 문장은
라디오를 위한 것도
소설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의 자신을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며칠 뒤
언덕마을에는
작은 소식이 돌기 시작했다

아래층 집에
새 세입자가 들어온다는 이야기
여인숙 주인이
방을 정리하고 있다는 이야기

305호에
사람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말도
어디선가 흘러나왔다

서이는 그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이웃이
아무렇지 않게 꺼낸 말이었다

요즘
여인숙이 좀 시끄럽더라
작가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나 봐

서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슴 한쪽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305호
그 공간이
곧 더 이상
자신들만의 장소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생각은
이상하게도
안도와 상실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날 밤
서이는 우진에게
짧은 메모를 남겼다

여인숙
요즘 바쁘다던데
괜찮아요

그 메모는
안부였고
경고였고
조심스러운 거리 두기였다

우진은 그 메모를 읽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아주 짧게 답장을 보냈다

알아요
그래서
요즘은
안 가요

그 답장은
사실이었다

그는 일부러
305호를 피해 다녔다
그곳에 가면
선택하지 않은 선택들이
다시 살아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며칠 후
비가 내리던 밤
서이와 우진은
또다시
언덕 아래에서 마주쳤다

이번에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서이는 우산을 들고 있었고
우진은
비를 맞은 채 서 있었다

우산 안으로
그를 부를지
아니면
그대로 지나칠지

서이는
그 선택의 순간에서
잠시 멈췄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우산을 조금 옆으로 기울였다

그 작은 움직임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하고 있었다

우진은
그 우산 아래로 들어오며
낮게 말했다

비 많이 오네요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요

둘은
같은 우산 아래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몸은 가깝지만
마음은
아직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우진이 말했다

요즘
괜찮아요

서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괜찮다고 말하면
거짓말일 것 같고
아니라고 말하면
설명해야 할 게 너무 많아요

우진은
그 말이
지금의 자신과도 같다는 걸 느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괜찮지 않은 걸로 하죠

서이는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쓸쓸함과
안도가 함께 섞여 있었다

비는 점점 거세졌고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두 사람의 침묵을 채웠다

그날 밤
둘은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고
아무 결론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은 선택들이
그 밤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그 선택들은
언젠가
반드시
결정을 요구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의 시간은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