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8부 기다림이 습관이 되었을 때

비가 그친 뒤의 언덕마을은
언제나 더 조용해졌다
젖은 벽에서 올라오는 냄새와
천천히 마르는 계단의 색
그 사이를 사람들은 말없이 오갔다

서이는 요즘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대해서라기보다
기다림 자체가 하루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면
가방을 내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누군가 올라오지 않을지
무심히 바라보는 시간

그 시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서 있었고
그 다음에는
생각을 하며 서 있었고
이제는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서 있었다

남편에게서는
여전히 간헐적인 메시지뿐이었다
돌아가면 이야기하자는 말
바쁘다는 말
그 말들에는
이미 기대도
의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서이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부엌에서 물을 끓였다
컵에 물을 따르며
문득
우진이 말하던 문장이 떠올랐다

사람은
선택하지 않은 일 때문에
더 오래 흔들린다

그 문장은
요즘의 자신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었다

우진에게도
기다림은 습관이 되어가고 있었다

퇴근 후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언덕 아래에서
잠시 멈추는 일
그는 그 시간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몸은 이미 기억하고 있었다

분식집 불빛
여인숙 방향
그리고
서이의 집 쪽 창문

그 창문에 불이 켜져 있으면
그는 조금 안심했고
불이 꺼져 있으면
괜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름 붙이지 않으려 애썼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선택이 되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집에 들어와
라디오를 켰다
오늘의 방송은
누군가의 편지를 읽는 코너였다

편지 속의 화자는
오래 기다린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기다림이 너무 길어져
그 사람이 오지 않아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게
자연스러워졌다는 이야기였다

우진은
그 문장을 읽으며
목소리가 잠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대로 읽었다

방송이 끝난 뒤
그는 라디오를 끄지 못한 채
한동안 앉아 있었다

며칠이 흘렀다
서이는 회사에서
문득
하루 종일 우진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이상하게도
안도보다
불안을 먼저 데려왔다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멀어졌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이미 마음속 깊이 들어와
의식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의미일까

서이는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언덕 아래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보았다

우진이었다

그는
혼자 서서
담배도 없이
그저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이는
발걸음을 멈췄다
부를까
그냥 지나갈까

그 짧은 망설임 끝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 옆에 섰다

우진은
그 기척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셨군요

그 말은
놀람이 아니라
기다림의 결과처럼 들렸다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좀 일찍 끝났어요

둘은
말없이 나란히 섰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지만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우진이 조용히 말했다

요즘
잘 지내요

서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잘 지내는 것 같아요
적어도
겉으로는요

우진은
그 말의 여백을 이해했다

저도
비슷해요

그 대답은
짧았지만
서로에게 충분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서이가 말했다

이렇게
아무 약속도 없이
마주치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오히려
자연스러워요

그 말에
서이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자연스러워졌다는 말은
습관이 되었다는 뜻이었고
습관이 되었다는 말은
이미 삶의 일부가 되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둘은 오래 서 있지 않았다
각자 갈 길이 있었고
각자 돌아가야 할 집이 있었다

헤어지기 전
우진이 말했다

오늘은
비 안 와서
다행이네요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그러나
그 말과 달리
둘의 마음에는
비슷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서이는
불을 켜고
창가에 섰다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조금 아팠다

우진 역시
집에 돌아와
불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앉았다

말하지 않은 말들
하지 않은 선택들
그 모든 것이
기다림이라는 이름으로
몸에 남아 있었다

기다림이 습관이 되었을 때
사람은
그 기다림이 끝나는 순간을
오히려 두려워하게 된다

서이와 우진은
아직
그 사실을
말로 꺼내지 않았지만

둘 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기다림은
언젠가
반드시
무언가를 바꾸게 될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