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3부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 다가온다

그날 이후
서이와 우진은
더 자주
같은 시간에
언덕 아래에 서 있었다
약속하지 않았지만
기다리지도 않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둘의 하루는
서로를 중심으로
아주 조금씩 조정되고 있었다

서이는 출근길에도
자주 생각했다
오늘은
그를 마주칠지
마주치지 않을지
그 생각이
하루의 리듬을 바꾸고 있었다

회사에서
업무에 집중하려 해도
문득문득
어젯밤의 공기가 떠올랐다
같이 걷던 속도
말없이 나누던 호흡
이름을 부르지 않은 채
서로를 가장 또렷하게 인식하던 순간들

그 관계는
분명히 깊어지고 있었지만
아직
말로 규정되지 않았다

그날 오후
서이는 남편에게서
다시 메시지를 받았다
내일 밤
돌아간다는 말
집에 있을 거냐는 질문

서이는 메시지를 읽고
한참을 화면만 바라보다가
짧게 답했다


있을 거야

그 대답을 보내는 순간
손끝이 조금 떨렸다
그 떨림은
기대가 아니라
예고처럼 느껴졌다

이제
더 이상
미뤄둘 수 없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

우진은
방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이의 메시지를 받았다

오늘
언덕 아래에서
잠깐 볼 수 있을까요

그 문장은
부탁처럼 보였지만
이미 결정된 일처럼 느껴졌다

우진은
잠시 멈춰 섰다가
답장을 보냈다

그 한 글자에는
망설임보다
각오가 더 많이 담겨 있었다

밤이 되었을 때
언덕 아래에는
서이가 먼저 와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녀는
코트를 단정히 여미고
가만히 서 있었다

우진이 다가오자
서이는 고개를 들었다

와줘서
고마워요

우진은
그 말을 들으며
잠시 멈칫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분명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

괜찮아요

둘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항구 쪽이 아니라
언덕 위
집들이 있는 방향으로

그 선택은
의도적이었다

조금 걷다가
서이가 멈춰 섰다

내일
남편이 돌아와요

그 말은
예고였고
고백이었고
경계선이었다

우진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알아요

그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실을
피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서이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

우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로등 아래에서
서이의 얼굴은
조용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지금까지와 달랐다
피하려던 침묵도
버티던 침묵도 아니었다

서이는
입술을 열었다


당신을
생각보다
많이 생각해요

그 말은
조심스러웠지만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우진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저도요

그 대답은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서이는
그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렸다

그 이름은
아직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었다

우진 역시
그녀를 바라보며
같은 상태에 있었다

이름을 부르면
이 관계는
더 이상
모호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둘은
그 직전에서
잠시 멈췄다

서이가 낮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 멈추지 않으면
다시는
예전으로 못 돌아갈 것 같아요

우진은
그 말의 무게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이미
예전으로는
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 말에
서이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오늘은
이름까지는
부르지 말아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둘은
조금 더 가까이 서 있었지만
끝내
손을 잡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서이는
자신의 심장이
너무 분명하게
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
이름을 부르는 순간은
시간의 문제가 되었다

그 순간이 오면
이 관계는
선택이 아니라
사실이 될 것이다

우진 역시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지 않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이름
그러나
이미 마음속에서는
수없이 불러본 이름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은
돌아갈 수 없는 방향으로
둘을 데려갈 준비를
이미 마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