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30부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는 말 대신 침묵이 남는다

서이는 그날 아침
아무 알람도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집 안은 아직 어두웠고
남편은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만이 일정하게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서이는 천천히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
특별한 짐을 싸지는 않았다
필요한 옷 몇 벌과
서류가 든 가방 하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집을 떠난다고 해서
모든 것을 가져갈 수는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부엌에 서서
물 한 잔을 마셨다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이 집에서 남기는
마지막 소리처럼 느껴졌다

서이는 남편의 얼굴을
다시 보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결심이 흔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아침 공기가
조금 차가웠다
그 차가움은
이상하게도
그녀를 또렷하게 만들었다

우진은 그날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집으로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언덕 아래로 가는 길에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옮겨졌다

그는
그곳에 서 있었다
기다린다는 말 대신
그 자리에 있다는 선택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서이가 나타났다
그녀의 모습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어딘가에서
이미 한 단계를 지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우진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았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서이는 다가와
아무 말 없이 섰다
둘 사이에는
이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우진이 먼저 말했다

결정했군요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 음절에는
많은 시간이 담겨 있었다

어디로 갈지는
말하지 않았다
얼마나 떨어질지도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서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지금까지의 침묵과 달랐다
미루는 침묵도
피하는 침묵도 아니었다

마무리의 침묵이었다

우진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네요

서이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내리깔았다

기다림이 끝났다는 말이
이별을 의미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낮게 말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 시간도
제 몫이었어요

그 말에는
원망도
후회도 없었다

그저
지나온 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서이는
한 발짝 물러섰다
그 움직임은
작았지만
분명했다

우진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붙잡는 순간
이별이 아니라
미련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이는 말했다

이름을 부른 순간
이미
여기까지 올 줄
알고 있었어요

우진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저도요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에 담으려 애쓰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남아 있었다

함께 걷던 밤
말없이 서 있던 시간
이름을 부르지 않던 방식
그리고
마침내 부르게 된 순간

그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을 기억이 될 것이었다

서이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우리가
사랑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우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래도
진심이었던 건
확실해요

그 말에
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해요

그녀는
천천히 돌아섰다
걸음은 빠르지 않았고
망설임도 없었다

우진은
그 자리에 남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끝까지 바라보았다

사라질 때까지

서이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
마지막으로 지킬 수 있는
선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우진은
그 자리를 떠났다

언덕 아래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곳은
다시
아무 일도 없던 장소가 되었다

몇 해가 지나
우진은 다른 도시에서
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고
이야기는 여전히 조용했다

어느 날
방송이 끝난 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람은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그 문장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충분했다

서이는
어느 낯선 도시의 거리에서
창문 너머로
저녁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불빛은
언덕 아래의 가로등과는
다른 색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조용한 온기는
비슷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이름도 부르지 않았다

그저
한때의 시간을
조용히 꺼내
마음속에 다시 접어 넣었다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는
말 대신 침묵이 남는다
그 침묵은
상처가 아니라
기억이 된다

서이와 우진의 이야기는
그렇게
말해지지 않은 채
끝났고

그래서
더 오래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