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8부 기다림이 습관이 되었을 때

비가 그친 뒤의 언덕마을은언제나 더 조용해졌다젖은 벽에서 올라오는 냄새와천천히 마르는 계단의 색그 사이를 사람들은 말없이 오갔다 서이는 요즘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었다무언가를 기대해서라기보다기다림 자체가 하루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면가방을 내려놓고창문을 열었다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누군가 올라오지 않을지무심히 바라보는 시간 그 시간이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에는아무 생각 없이 서 있었고그 다음에는생각을 하며 서 있었고이제는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7부 선택하지 않은 선택들이 밤을 채운다

그날 이후서이와 우진은서로를 더 자주 떠올리게 되었지만의도적으로만나는 횟수는 줄였다마주치지 않기 위해조금 더 빨리 집에 들어가고조금 더 늦게 출근했다 그러나선택하지 않은 선택들은밤이 될수록더 크게 마음을 채웠다 서이는 퇴근 후집에 들어와 불을 켜지 않았다어둠 속에 앉아창밖을 바라보며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남편에게서또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이번 주도 돌아가기 어렵다는 말회의가 길어졌다는 말늘 그렇듯사과는 짧았고설명은 없었다 서이는 메시지를 읽고휴대전화를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6부 말하지 못한 고백은 몸에 남는다

그날 이후서이와 우진은의도적으로 305호를 피했다서로 연락하지도약속하지도 않았지만이상하게도각자의 하루는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서이는 퇴근 후집으로 곧장 올라갔다집 안의 공기는언제나처럼 조용했고남편의 흔적은전화기 속 메시지 몇 줄뿐이었다출장이 길어질 거라는 말바쁘다는 말늘 같은 문장들 그 문장들을 읽으며서이는 자신이 더 이상화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 무감각이오히려 더 무서웠다 식탁에 앉아혼자 저녁을 먹다가문득계단 아래에서 마주쳤던우진의 얼굴이 떠올랐다말을 아끼던 표정그러나 숨기지 못했던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5부 다시 마주친 계단의 온도

그날 저녁서이는 퇴근 시간이 평소보다 조금 늦어졌다회사에서 잡무가 길어졌고집중하려 해도 자꾸만 마음이 흐트러졌다시계를 볼 때마다언덕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떠올랐고그 계단 끝에 있는 여인숙의 불빛이 떠올랐다 서이는 가방을 들고 회사 문을 나섰다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길늘 하던 선택과는 다르게그녀는 분식집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의도적인 선택이라기보다몸이 먼저 기억해낸 길이었다 분식집 앞에 섰을 때안에서는 평소처럼 사람들이 떠들고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4부 서이가 사라진 저녁들

서이는 그날 이후305호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의식적으로 멈춘 것이었고억지로 멈춘 것이었다마음은 이미 수없이 다락방 계단을 오르고 있었지만몸만이 그 마음을 붙잡고 있었다 퇴근 후늘 분식집 쪽으로 향하던 길에서서이는 집으로 바로 올라갔다우산을 접고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르며자신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오늘은 가지 말자오늘만은내일은 모르겠지만오늘은 집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남편은 출장 중이었고전화도 없었다서이는 가방을 내려놓고불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3부 소문이 언덕을 타고 올라오는 속도

언덕마을의 소문은비보다 빨리 번졌다눈에 보이지 않지만벽을 타고계단을 타고사람들의 말끝을 타고조용히 위로 위로 올라왔다 서이는 어느 날 아침출근 준비를 하다가문득 복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집주인 할머니와 아래층 아주머니의 대화였다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말들은의도하지 않아도 귀에 꽂혔다 요즘 저 집밤마다 불 켜져 있더라혼자 사는 것도 아닌데 젊은 사람들 사는 집이 다 그런 거지 뭐근데좀 자주 늦긴 하더라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2부 선을 긋는 연습 마음은 자꾸 번진다

305호로 올라가는 계단은 여전히 삐걱거렸다나무가 오래되어서 나는 소리였지만서이는 그 소리가 마치자신의 마음이 내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날은 비가 오지 않았다비가 오지 않는 밤은오히려 더 조용해서생각이 또렷해지는 법이었다서이는 그런 밤이조금 두려웠다 305호 문 앞에 서서잠시 손잡이를 잡은 채 멈췄다오늘은조금만 이야기하고조금만 쓰고일찍 내려가자고스스로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문을 열자우진은 이미 와 있었다책상 위에는 대본이 펼쳐져 있었고파란 만년필이 종이 위에 가지런히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1부 우리가 쓰는 이야기와 우리가 숨긴 이야기

305호 다락방의 밤공기는 낮보다 더 조용했다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바람은 오래된 커튼을 살짝 흔들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그 바람에는 항구의 냄새와 젖은 나무 냄새가 섞여 있었고그 냄새는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집중을 깊게 만들었다 서이는 책상 위에 대본을 펼쳐 두고연필로 여백에 작은 메모를 남기고 있었다우진은 그 옆에서 만년필을 쥔 채그녀가 말하는 내용을 조용히 받아 적었다 여기서여자 주인공이 그냥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0부 여인숙 다락방 305호

우진이 자신이 쓴 첫 번째 대본을 건네던 그날 밤미정분식의 오래된 전등은 노랗게 흔들리고 있었다작은 방울이 달린 문은 계속 열렸다 닫히며 잔잔한 울림을 남겼고서이는 가만히 그 대본을 손에 쥐고 앉아 있었다창밖에서는 가로등 아래 비가 다시 흩뿌리기 시작했고분식집 바닥에는 젖은 빗물이 조금씩 묻어 들어오고 있었다 서이는 대본을 읽었다그리고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본은 짧았지만그 안에는우진 자신의 마음이 너무도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9부 우진의 첫 번째 대본

밤골목에서 헤어진 후우진은 집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등을 문에 기댄 채 깊은 숨을 내쉬었다온종일 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듯했다수십 번 심장이 멈출 것 같았고수백 번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그러나 그 모든 혼란 속에서 이어지는 길은 단 하나였다 지금무언가를 써야 한다는 것 그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책상 앞으로 걸어가의자에 털썩 앉았다그리고파란 만년필을 손에 쥐었다 …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