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8부 떠나는 사람보다 남는 사람이 더 오래 아프다

서이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자신이 이미 결심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아직 아무 것도 정리되지 않았지만마음은 이미 한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 부엌에서 남편이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신문을 넘기는 소리시계를 확인하는 소리모두 익숙한 소리들이었다그 소리들 속에서서이는 문득 깨달았다이 집은 여전히 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자신은 더 이상 이 집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것을 남편이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7부 말하지 않아도 끝이 보이는 순간

그날 이후서이의 하루는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집 안에서는남편의 움직임이 늘어났고말도 이전보다 많아졌지만그럴수록서이는 더 조용해졌다 남편은 아침마다같은 시간에 출근했고저녁에는비슷한 시간에 돌아왔다그 규칙적인 생활은이 집이 여전히정상이라는 증거처럼 보였지만 서이에게는그 모든 것이이미 끝나 있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식탁에 마주 앉아밥을 먹다가남편이 말을 꺼냈다 요즘우리좀 이상하지 않아 그 말은조심스러웠지만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서이는 젓가락을 내려놓고잠시 숨을 고른 뒤대답했다 예전부터이상했어 그 말은차분했고감정이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6부 함께 있어도 혼자인 밤들

남편이 돌아온 뒤집은 다시 사람의 형태를 갖추었지만서이의 하루는더 비어 있었다같은 공간에 앉아 있어도서로의 하루를 묻지 않았고대답이 필요한 질문도 없었다 저녁을 먹고각자 다른 방향으로 등을 돌렸다남편은 신문을 펼쳤고서이는 창가에 섰다창밖의 불빛은언제나처럼 언덕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서이는 그 불빛을 바라보며함께 있어도 혼자인 밤이이렇게 선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처음 알았다 우진의 밤도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아내가 친정에 머무는 동안집은 조용했지만그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5부 돌아와 있는 사람과 돌아오지 않은 마음

남편이 돌아온 날 저녁집 안에는오랜만에 사람의 기척이 있었다캐리어가 바닥에 닿는 소리코트를 벗어 거는 소리익숙했지만이미 오래전의 기억처럼 느껴지는 소리들 서이는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있었다남편은 거실에 앉아출장 이야기를 짧게 늘어놓았다회의가 어땠는지어디를 다녀왔는지누구를 만났는지 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그 말을 들었다듣고는 있었지만말들이 마음에 닿지는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분명히 집 안에 있었지만그녀의 마음은다른 곳에 머물러 있었다 언덕 아래가로등 불빛그리고이름을 부르던 순간 그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4부 이름이 먼저 새어나온 밤

그날 밤서이는 집에 돌아와도바로 잠들지 못했다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지만눈은 감기지 않았다천장 위로가로등 불빛이커튼 틈 사이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일이면남편이 돌아온다그 사실은현실처럼 무겁게 다가왔지만그보다 더 크게서이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아직 부르지 않은 이름이었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그 이름은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고숨을 쉴 때마다조금씩 앞으로 밀려 나왔다 서이는이불을 끌어당기며스스로에게 말했다 오늘까지만오늘까지만 그러나그 말은약속이라기보다시간을 미루는 방식에 가까웠다 우진도그날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3부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 다가온다

그날 이후서이와 우진은더 자주같은 시간에언덕 아래에 서 있었다약속하지 않았지만기다리지도 않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둘의 하루는서로를 중심으로아주 조금씩 조정되고 있었다 서이는 출근길에도자주 생각했다오늘은그를 마주칠지마주치지 않을지그 생각이하루의 리듬을 바꾸고 있었다 회사에서업무에 집중하려 해도문득문득어젯밤의 공기가 떠올랐다같이 걷던 속도말없이 나누던 호흡이름을 부르지 않은 채서로를 가장 또렷하게 인식하던 순간들 그 관계는분명히 깊어지고 있었지만아직말로 규정되지 않았다 그날 오후서이는 남편에게서다시 메시지를 받았다내일 밤돌아간다는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2부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방식

그날부터서이와 우진은서로의 이름을입 밖으로 거의 꺼내지 않았다불러야 할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부르는 순간지금 유지하고 있는 균형이깨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름은사람을 현실로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그들은아직 이 관계를완전히 현실로 만들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둘은눈으로만 알아보고목소리로만 확인했다멀리서도걸음걸이로숨소리로서로를 알아보는 법을이미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서이는 요즘집에 있어도집에 있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남편의 물건들은 그대로 있었고가구의 위치도 변한 것이 없었지만그 공간은이미 오래전부터사람이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1부 더 이상 부재로 돌아갈 수 없을 때

그 다음 날 아침서이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눈을 떴다알람을 끄고도 한참을 누워 있었다전날 밤의 공기가아직 몸에 남아 있는 것처럼숨을 들이마실 때마다가슴이 조금 묵직했다 거울 앞에 섰을 때자신의 얼굴이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지만그녀는 알고 있었다어젯밤 이후자신은 이미이전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출근 준비를 하며남편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이번 주말도 어렵다는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0부 돌아가지 않는 발걸음

그날 이후서이의 하루는어딘가에서 살짝 어긋나 있었다큰 변화는 없었지만작은 선택들이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퇴근 후집으로 곧장 올라가던 발걸음은언덕 아래에서자주 멈췄다그곳에 서서아무 일도 없는 척휴대전화를 들여다보거나가방 속을 정리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 시간 동안서이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으려 애썼다왜 멈추는지누구를 기다리는지대답을 알면서도말로 확인하는 순간돌아갈 수 없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편에게서는이번에도돌아오는 날짜를 확정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왔다회의가 늘어났다는 말일이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9부 마음이 먼저 도착하는 밤

그날 밤서이는 집에 들어와도바로 불을 켜지 않았다어둠 속에서 신발을 벗고가방을 내려놓고천천히 숨을 고르며 서 있었다집은 조용했고남편의 기척은 없었다그 조용함은 이제낯설지 않았다 창가로 다가가커튼을 살짝 젖혔다언덕 아래 도로에는가로등 불빛만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사람은 보이지 않았고차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그 고요함 속에서서이는 조금 전 우진과 나란히 서 있던 순간을 떠올렸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그 침묵 속에는분명한 온도가 있었다서로를 바라보지 …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