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12부 이름의 균열을 향해 걸어가는 자들

문을 지나자마자 공기가 바뀌었다.아니 정확히는 공기가 ‘무너졌다’라는 표현이 더 가까웠다.유라와 리테가 들어선 공간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으며, 건조하지도 습하지도 않았다. 마치 공기라는 개념이 붕괴된 세계였고, 대신 아주 오래된 숨결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둘은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그러나 숨은 폐 속으로 제대로 도달하지 않았다.그냥 공기가 지나가는 느낌만 있었고, 산소의 감각은 희미해졌다. 리테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문 뒤 … Read more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11부 문 너머에서 마주한 낯선 방과 잊혀진 첫 이름

문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떨리면서 천천히 열렸다. 그 떨림은 두 사람의 손끝을 타고 몸 전체로 퍼져 들어왔고, 마치 오래된 기억이 부활을 준비하며 신경줄기를 따라 움직이는 듯한 이상한 전율을 만들었다. 유라와 리테는 숨을 삼켰다. 문이 열리면서 그 안쪽에서 뿜어져 나온 공기는 지하의 어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는데, 그냥 ‘온도’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 Read more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10부 지하의 첫 문이 열릴 때

심연극장의 입구는 도시의 균열 속에서 마치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숨겨진 동맥처럼 깊게 이어져 있었다. 두 사람의 발끝이 어둠 속 계단 위에 닿는 순간 공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마치 지하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그들의 발걸음을 감지하며 가볍게 숨을 내쉬는 듯한 떨림이었다. 계단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고 어둡게 내려가 있었다. 가로등이나 등불 같은 것은 없었지만, 벽면 자체에서 희미한 … Read more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9부 심연 아래 첫걸음을 내딛는 자들

틈이 열린 골목은 마치 도시가 입을 벌려 무언가를 삼키려는 모습처럼 보였다. 어둠의 균열은 아주 천천히 벌어진 채 그 안쪽 깊이를 드러내고 있었고, 그 틈 사이에서 올라오는 공기는 이상할 만큼 온기가 없었다. 따뜻함도 차가움도 없는 공기. 온도라는 감각이 사라진 층에서만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은 공기였다. 유라와 리테는 동시에 숨을 죽였다. 그들의 머리 위로 가로등 불빛이 … Read more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8부 심연극장의 문을 부르는 세 가지 신호

도시는 완전히 밤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가늘게 피어올랐고, 골목의 그림자들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길게 늘어지며 도로 위를 기어 다녔다. 오래된 창문들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떨렸고, 빌라 간판들은 약한 전류가 흐르듯 깜빡였다. 리테는 골목을 벗어나 언덕 아래의 큰 길로 나왔다. 폐허 식당에서 들었던 이상한 목소리와, 골목에서 만난 사내의 차가운 눈빛이 … Read more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7부 예견된 공포와 나타난 낯선 사내

도시는 밤이 되면 스스로를 감추기 위해 조금 더 느릿하게 호흡을 내쉬는 것처럼 보였다. 낮 동안 항만의 소음과 도시의 동요로 뒤섞여 있던 숨결은 어둠이 내려오자 갑자기 가라앉았고, 가로등 불빛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잔잔히 흔들렸다. 리테는 폐허 식당을 뛰쳐나온 뒤 한참 동안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식당 창문 너머로 본 작은 실루엣, 그것이 유라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인지 … Read more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6부 폐허 식당에서 들려온 악몽의 조각

도시의 저녁은 언제나 느리게 찾아왔다. 그림자 항로 위에 가로등이 완전히 켜지기까지는 시간을 질질 끌며 천천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 사이 도시 중심부에서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항만에서는 저녁 작업을 마무리하는 경적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언덕 아래 오래된 골목과 그 근처에 있는 작은 식당들은 낮과 밤 모두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 식당은 특히 오래되고 폐허처럼 … Read more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5부 손에 남은 단 하나의 단서 리세

유라는 벤치에서 일어난 뒤 한동안 같은 자리 주위를 서성거렸다. 언덕 위 공기가 조금 더 차가워졌고, 구름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점점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시간의 감각이 흐려지면서 몸 안에 남은 것은 묘한 긴장과 어딘가로 끌려가는 느낌뿐이었다. 도시에 도착한 첫날이었다. 아직 숙소도 잡지 않은 상태였고, 어디서 밤을 보낼지도 정하지 못한 채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쪽에서는 이해하기 … Read more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4부 감춰진 방과 두 사람의 첫 만남

아침이 완전히 지나가고, 도시의 흐린 낮빛이 서서히 누렇게 바래가던 시간. 리테는 아직 방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두 손은 침대 옆 기둥을 잡고 있었고, 손등에는 약간의 힘이 남아 있었다. 그 힘은 계단 아래에서 들린 목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몸속 어딘가 깊은 곳에서 스스로를 붙잡고 있는 불안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방 안으로 다시 … Read more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3부 빛의 항로로 향한 한 소녀의 도착

도시의 낮은 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층 건물들이 뒤엉킨 언덕과 바다를 잇는 길 위로 희뿌연 안개가 떠 있었고, 가로등은 꺼졌지만 회색빛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어 모든 것이 흐린 빛에 잠겨 있었다. 항만에서는 여전히 화물선의 경적이 간헐적으로 울려 퍼졌고, 크레인들이 거대한 팔을 천천히 움직이며 컨테이너를 옮기고 있었다. 이 도시에 처음 발을 들이는 사람이라면 어디가 중심부인지, 어디까지가 …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