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불의 사람 – 4부 작은 마을의 제보자

렌 파크는 새벽에 눈을 떴다. 창밖은 아직 어둡고 집 안은 고요했다. 노아의 방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인 숨소리였다. 렌은 그 소리를 확인하듯 잠시 멈췄다가 조용히 부엌으로 갔다. 커피를 끓이고 노트를 펼쳤다. 숫자는 전날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숫자 사이의 간격은 달라지고 있었다. 간격은 방향을 말해주었다. 그날 그는 사냥을 나갈 준비를 했다. 사냥은 그에게 핑계였다. 사냥을 말하면 … Read more

검은 불의 사람 – 3부 빌린 가족

렌 파크는 노아가 집에 들어온 첫날 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기보다는 잠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호흡을 세었다. 호흡은 일정했다. 일정함은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날의 집은 이전과 달랐다. 바닥에서 들리는 작은 움직임. 물을 마시러 나오는 발소리.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닫히는 소리. 그 모든 소리는 새로운 변수였다. 변수는 관리해야 … Read more

검은 불의 사람 – 2부 검은 기름의 냄새

렌 파크는 침대에서 내려오기까지 오래 걸렸다. 다리는 아직 온전하지 않았고 통증은 아침마다 다른 얼굴로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통증을 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통증은 신호였다. 신호는 판단을 돕는 자료였다. 그는 붕대를 풀어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고정했다. 창밖의 공기는 차가웠다. 그는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숨을 고르는 일은 계산의 시작이었다. 그는 마을로 내려가지 않았다. 대신 서류와 보고서를 불러 모았다. … Read more

검은 불의 사람 – 1부 은맥 아래의 고독

렌 파크는 새벽이 오기 전부터 갱도의 입구에 서 있었다. 하늘은 아직 밤의 색을 품고 있었고 바람은 광산의 냄새를 실어 날랐다. 그는 장화를 고쳐 신고 등불의 불씨를 확인한 뒤 말없이 갱도로 내려갔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그는 혼자였다. 혼자인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의 소리가 없는 이 깊이는 그에게 계산을 허락했다. 땅의 층위를 머릿속에서 나누고 금속의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30부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는 말 대신 침묵이 남는다

서이는 그날 아침아무 알람도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집 안은 아직 어두웠고남편은 잠들어 있었다숨소리만이 일정하게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서이는 천천히 일어나옷장을 열었다특별한 짐을 싸지는 않았다필요한 옷 몇 벌과서류가 든 가방 하나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집을 떠난다고 해서모든 것을 가져갈 수는 없다는 것을이미 알고 있었다 부엌에 서서물 한 잔을 마셨다컵을 내려놓는 소리가이 집에서 남기는마지막 소리처럼 느껴졌다 서이는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9부 남기지 못한 말은 결국 시간을 남긴다

서이는 그날 아침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떴다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시간집 안은 고요했고남편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서이는 침대에서 조용히 일어나거실로 나왔다창문을 열자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그 공기 속에서이 집의 냄새가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곳에서 맡았던 공기이곳에서 지켜야 했던 역할 그 모든 것이이미 과거의 층으로천천히 밀려나고 있었다 서이는 소파에 앉아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아직 아무 말도 하지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8부 떠나는 사람보다 남는 사람이 더 오래 아프다

서이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자신이 이미 결심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아직 아무 것도 정리되지 않았지만마음은 이미 한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 부엌에서 남편이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신문을 넘기는 소리시계를 확인하는 소리모두 익숙한 소리들이었다그 소리들 속에서서이는 문득 깨달았다이 집은 여전히 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자신은 더 이상 이 집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것을 남편이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7부 말하지 않아도 끝이 보이는 순간

그날 이후서이의 하루는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집 안에서는남편의 움직임이 늘어났고말도 이전보다 많아졌지만그럴수록서이는 더 조용해졌다 남편은 아침마다같은 시간에 출근했고저녁에는비슷한 시간에 돌아왔다그 규칙적인 생활은이 집이 여전히정상이라는 증거처럼 보였지만 서이에게는그 모든 것이이미 끝나 있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식탁에 마주 앉아밥을 먹다가남편이 말을 꺼냈다 요즘우리좀 이상하지 않아 그 말은조심스러웠지만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서이는 젓가락을 내려놓고잠시 숨을 고른 뒤대답했다 예전부터이상했어 그 말은차분했고감정이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6부 함께 있어도 혼자인 밤들

남편이 돌아온 뒤집은 다시 사람의 형태를 갖추었지만서이의 하루는더 비어 있었다같은 공간에 앉아 있어도서로의 하루를 묻지 않았고대답이 필요한 질문도 없었다 저녁을 먹고각자 다른 방향으로 등을 돌렸다남편은 신문을 펼쳤고서이는 창가에 섰다창밖의 불빛은언제나처럼 언덕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서이는 그 불빛을 바라보며함께 있어도 혼자인 밤이이렇게 선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처음 알았다 우진의 밤도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아내가 친정에 머무는 동안집은 조용했지만그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5부 돌아와 있는 사람과 돌아오지 않은 마음

남편이 돌아온 날 저녁집 안에는오랜만에 사람의 기척이 있었다캐리어가 바닥에 닿는 소리코트를 벗어 거는 소리익숙했지만이미 오래전의 기억처럼 느껴지는 소리들 서이는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있었다남편은 거실에 앉아출장 이야기를 짧게 늘어놓았다회의가 어땠는지어디를 다녀왔는지누구를 만났는지 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그 말을 들었다듣고는 있었지만말들이 마음에 닿지는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분명히 집 안에 있었지만그녀의 마음은다른 곳에 머물러 있었다 언덕 아래가로등 불빛그리고이름을 부르던 순간 그 …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