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4부 이름이 먼저 새어나온 밤

그날 밤서이는 집에 돌아와도바로 잠들지 못했다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지만눈은 감기지 않았다천장 위로가로등 불빛이커튼 틈 사이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일이면남편이 돌아온다그 사실은현실처럼 무겁게 다가왔지만그보다 더 크게서이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아직 부르지 않은 이름이었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그 이름은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고숨을 쉴 때마다조금씩 앞으로 밀려 나왔다 서이는이불을 끌어당기며스스로에게 말했다 오늘까지만오늘까지만 그러나그 말은약속이라기보다시간을 미루는 방식에 가까웠다 우진도그날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3부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 다가온다

그날 이후서이와 우진은더 자주같은 시간에언덕 아래에 서 있었다약속하지 않았지만기다리지도 않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둘의 하루는서로를 중심으로아주 조금씩 조정되고 있었다 서이는 출근길에도자주 생각했다오늘은그를 마주칠지마주치지 않을지그 생각이하루의 리듬을 바꾸고 있었다 회사에서업무에 집중하려 해도문득문득어젯밤의 공기가 떠올랐다같이 걷던 속도말없이 나누던 호흡이름을 부르지 않은 채서로를 가장 또렷하게 인식하던 순간들 그 관계는분명히 깊어지고 있었지만아직말로 규정되지 않았다 그날 오후서이는 남편에게서다시 메시지를 받았다내일 밤돌아간다는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2부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방식

그날부터서이와 우진은서로의 이름을입 밖으로 거의 꺼내지 않았다불러야 할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부르는 순간지금 유지하고 있는 균형이깨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름은사람을 현실로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그들은아직 이 관계를완전히 현실로 만들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둘은눈으로만 알아보고목소리로만 확인했다멀리서도걸음걸이로숨소리로서로를 알아보는 법을이미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서이는 요즘집에 있어도집에 있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남편의 물건들은 그대로 있었고가구의 위치도 변한 것이 없었지만그 공간은이미 오래전부터사람이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1부 더 이상 부재로 돌아갈 수 없을 때

그 다음 날 아침서이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눈을 떴다알람을 끄고도 한참을 누워 있었다전날 밤의 공기가아직 몸에 남아 있는 것처럼숨을 들이마실 때마다가슴이 조금 묵직했다 거울 앞에 섰을 때자신의 얼굴이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지만그녀는 알고 있었다어젯밤 이후자신은 이미이전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출근 준비를 하며남편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이번 주말도 어렵다는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0부 돌아가지 않는 발걸음

그날 이후서이의 하루는어딘가에서 살짝 어긋나 있었다큰 변화는 없었지만작은 선택들이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퇴근 후집으로 곧장 올라가던 발걸음은언덕 아래에서자주 멈췄다그곳에 서서아무 일도 없는 척휴대전화를 들여다보거나가방 속을 정리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 시간 동안서이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으려 애썼다왜 멈추는지누구를 기다리는지대답을 알면서도말로 확인하는 순간돌아갈 수 없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편에게서는이번에도돌아오는 날짜를 확정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왔다회의가 늘어났다는 말일이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9부 마음이 먼저 도착하는 밤

그날 밤서이는 집에 들어와도바로 불을 켜지 않았다어둠 속에서 신발을 벗고가방을 내려놓고천천히 숨을 고르며 서 있었다집은 조용했고남편의 기척은 없었다그 조용함은 이제낯설지 않았다 창가로 다가가커튼을 살짝 젖혔다언덕 아래 도로에는가로등 불빛만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사람은 보이지 않았고차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그 고요함 속에서서이는 조금 전 우진과 나란히 서 있던 순간을 떠올렸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그 침묵 속에는분명한 온도가 있었다서로를 바라보지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8부 기다림이 습관이 되었을 때

비가 그친 뒤의 언덕마을은언제나 더 조용해졌다젖은 벽에서 올라오는 냄새와천천히 마르는 계단의 색그 사이를 사람들은 말없이 오갔다 서이는 요즘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었다무언가를 기대해서라기보다기다림 자체가 하루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면가방을 내려놓고창문을 열었다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누군가 올라오지 않을지무심히 바라보는 시간 그 시간이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에는아무 생각 없이 서 있었고그 다음에는생각을 하며 서 있었고이제는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7부 선택하지 않은 선택들이 밤을 채운다

그날 이후서이와 우진은서로를 더 자주 떠올리게 되었지만의도적으로만나는 횟수는 줄였다마주치지 않기 위해조금 더 빨리 집에 들어가고조금 더 늦게 출근했다 그러나선택하지 않은 선택들은밤이 될수록더 크게 마음을 채웠다 서이는 퇴근 후집에 들어와 불을 켜지 않았다어둠 속에 앉아창밖을 바라보며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남편에게서또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이번 주도 돌아가기 어렵다는 말회의가 길어졌다는 말늘 그렇듯사과는 짧았고설명은 없었다 서이는 메시지를 읽고휴대전화를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6부 말하지 못한 고백은 몸에 남는다

그날 이후서이와 우진은의도적으로 305호를 피했다서로 연락하지도약속하지도 않았지만이상하게도각자의 하루는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서이는 퇴근 후집으로 곧장 올라갔다집 안의 공기는언제나처럼 조용했고남편의 흔적은전화기 속 메시지 몇 줄뿐이었다출장이 길어질 거라는 말바쁘다는 말늘 같은 문장들 그 문장들을 읽으며서이는 자신이 더 이상화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 무감각이오히려 더 무서웠다 식탁에 앉아혼자 저녁을 먹다가문득계단 아래에서 마주쳤던우진의 얼굴이 떠올랐다말을 아끼던 표정그러나 숨기지 못했던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5부 다시 마주친 계단의 온도

그날 저녁서이는 퇴근 시간이 평소보다 조금 늦어졌다회사에서 잡무가 길어졌고집중하려 해도 자꾸만 마음이 흐트러졌다시계를 볼 때마다언덕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떠올랐고그 계단 끝에 있는 여인숙의 불빛이 떠올랐다 서이는 가방을 들고 회사 문을 나섰다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길늘 하던 선택과는 다르게그녀는 분식집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의도적인 선택이라기보다몸이 먼저 기억해낸 길이었다 분식집 앞에 섰을 때안에서는 평소처럼 사람들이 떠들고 …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