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4부 서이가 사라진 저녁들

서이는 그날 이후305호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의식적으로 멈춘 것이었고억지로 멈춘 것이었다마음은 이미 수없이 다락방 계단을 오르고 있었지만몸만이 그 마음을 붙잡고 있었다 퇴근 후늘 분식집 쪽으로 향하던 길에서서이는 집으로 바로 올라갔다우산을 접고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르며자신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오늘은 가지 말자오늘만은내일은 모르겠지만오늘은 집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남편은 출장 중이었고전화도 없었다서이는 가방을 내려놓고불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3부 소문이 언덕을 타고 올라오는 속도

언덕마을의 소문은비보다 빨리 번졌다눈에 보이지 않지만벽을 타고계단을 타고사람들의 말끝을 타고조용히 위로 위로 올라왔다 서이는 어느 날 아침출근 준비를 하다가문득 복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집주인 할머니와 아래층 아주머니의 대화였다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말들은의도하지 않아도 귀에 꽂혔다 요즘 저 집밤마다 불 켜져 있더라혼자 사는 것도 아닌데 젊은 사람들 사는 집이 다 그런 거지 뭐근데좀 자주 늦긴 하더라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2부 선을 긋는 연습 마음은 자꾸 번진다

305호로 올라가는 계단은 여전히 삐걱거렸다나무가 오래되어서 나는 소리였지만서이는 그 소리가 마치자신의 마음이 내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날은 비가 오지 않았다비가 오지 않는 밤은오히려 더 조용해서생각이 또렷해지는 법이었다서이는 그런 밤이조금 두려웠다 305호 문 앞에 서서잠시 손잡이를 잡은 채 멈췄다오늘은조금만 이야기하고조금만 쓰고일찍 내려가자고스스로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문을 열자우진은 이미 와 있었다책상 위에는 대본이 펼쳐져 있었고파란 만년필이 종이 위에 가지런히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1부 우리가 쓰는 이야기와 우리가 숨긴 이야기

305호 다락방의 밤공기는 낮보다 더 조용했다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바람은 오래된 커튼을 살짝 흔들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그 바람에는 항구의 냄새와 젖은 나무 냄새가 섞여 있었고그 냄새는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집중을 깊게 만들었다 서이는 책상 위에 대본을 펼쳐 두고연필로 여백에 작은 메모를 남기고 있었다우진은 그 옆에서 만년필을 쥔 채그녀가 말하는 내용을 조용히 받아 적었다 여기서여자 주인공이 그냥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0부 여인숙 다락방 305호

우진이 자신이 쓴 첫 번째 대본을 건네던 그날 밤미정분식의 오래된 전등은 노랗게 흔들리고 있었다작은 방울이 달린 문은 계속 열렸다 닫히며 잔잔한 울림을 남겼고서이는 가만히 그 대본을 손에 쥐고 앉아 있었다창밖에서는 가로등 아래 비가 다시 흩뿌리기 시작했고분식집 바닥에는 젖은 빗물이 조금씩 묻어 들어오고 있었다 서이는 대본을 읽었다그리고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본은 짧았지만그 안에는우진 자신의 마음이 너무도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9부 우진의 첫 번째 대본

밤골목에서 헤어진 후우진은 집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등을 문에 기댄 채 깊은 숨을 내쉬었다온종일 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듯했다수십 번 심장이 멈출 것 같았고수백 번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그러나 그 모든 혼란 속에서 이어지는 길은 단 하나였다 지금무언가를 써야 한다는 것 그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책상 앞으로 걸어가의자에 털썩 앉았다그리고파란 만년필을 손에 쥐었다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8부 밤골목에서 시작된 긴 대화

밤은 깊어가고 있었지만언덕마을은 여전히 조용했다가로등에 비친 벌레의 그림자만이 벽에 아른거렸고멀리 항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조차오늘따라 무기력하게 퍼져나갔다 비가 오지 않았지만두 사람의 마음에는여전히 스며드는 습기가 남아 있었다서이와 우진은 계단 아래 비가림 포구에 나란히 앉아잠시 말을 잃은 채서서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어색함을 넘어서는묵직한 공감에 가까웠다서로의 상처를 마주한 후그 상처를 처음으로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7부 우리는 같은 상처를 가진 이웃

장우진은 터미널에서 본 예약 명단의 충격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언덕마을의 계단을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비는 오지 않았지만마음 안에서 내리는 비는 멈춘 적이 없었다 계단을 오르며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을 떠올렸다 언젠가부터지현과의 대화는 짧아지고감정은 얇아지고밤이 깊어져도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아내는 피곤하다는 말로 모든 걸 덮어두었고우진은 그 말 뒤에 숨은 감정을 끝까지 물어보지 않았다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6부 예약 명단에서 본 두 사람의 이름

장우진은 그날도 야근을 마치고 늦은 시간에 방송국을 나섰다비는 오지 않았지만 공기에는 습기가 묵직하게 남아 있었다항구 도시 특유의 끈적한 바람은사람의 몸뿐 아니라 마음마저 축축하게 만든다는 것을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버스를 타지 않고 언덕마을까지 걸어가기로 했다어디론가 가버린 집중력대본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활자들아내가 새벽 근무라며 남긴 짧은 메모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여그는 처음부터 걷는 것이 맞다는 듯천천히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5부 초록 스카프와 파란 만년필

비는 멈춘 듯하다가도 다시 내렸다언덕마을의 하늘은 어느 순간부터 우산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계절에 들어섰다시멘트 벽에 그대로 배어드는 비 냄새빗물이 고여 반짝이는 계단가끔 누군가의 신발이 미끄러지며 좁은 골목에 작은 파문을 만들고그 파문 속에서 사람들은 조용히 자신의 일상을 이어나갔다 서이는 어느 날퇴근 후 집 안 작은 화장대 앞에 앉아 스카프를 펼쳐보았다초록빛이 은은하게 퍼지는 얇은 소재의 스카프남편 민석이 …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