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4부 각자의 결혼이 조금씩 어긋나던 때

언덕마을의 아침은 늘 같은 소리로 시작되었다빨래를 터는 소리옆집 문이 열리는 소리출근하는 아저씨들의 가벼운 발걸음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그 익숙한 소리들 사이에서서이와 우진의 삶은 조금씩겁나게 작은 틈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서이는 출근 준비를 하며 부엌 테이블에 앉았다서랍에서 남편이 준 초록색 스카프를 꺼내 목에 천천히 두르는 동안얼마 전 분식집에서 우진과 마주쳤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조용하고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3부 비가 오는 날마다 같은 자리

비는 계절의 경계를 지우는 방식으로 내렸다여름이 다가오는 길목에서 내리는 비는 단순히 땅을 적셔놓는 수준이 아니라세월과 기억을 덮어버리는 듯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언덕마을은 그 비가 올 때마다 숨을 고르는 것처럼 고요해졌다 이곳에 살아본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비 오는 날 언덕골목의 소리는 묘하게 사람 마음을 흔든다고발자국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계단을 내려가는 물소리가 오래 머무른다그리고그날 그 시간에 만나지 않던 사람들이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부 분식집에서 처음 마주친 얼굴

언덕마을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오후 다섯 시쯤이었다바닷가 근처라 그런지 이 동네는 유난히 비가 자주 내렸다그리고 비가 오면 어김없이 골목 아래 분식집 간판에 노란 불이 켜졌다가게 이름은 빛바랜 페인트로 적힌 미정분식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근처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그리고 이 동네에 오래 살았던 주민들에겐 익숙한 장소였다 한서이는 회사에서 퇴근하자마자 자동으로 우산을 펴고 골목을 내려갔다언덕 꼭대기에서 아래까지 이어지는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부 이사 오는 날 언덕 위의 두 집

1997년 늦봄의 인천은 유난히 습기가 많았다계절이 여름으로 기울어가는 길목에 서 있던 그 해의 바람은 바닷가 비린내를 머금고 언덕골목을 천천히 오르내렸고그 바람 속에서 오래된 벽돌집들은 한숨을 토하듯 낡은 기와를 흔들었다그날 아침 언덕 아래로부터 차 한 대가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춰섰고이삿짐센터 직원들이 허리를 세우며 문을 열었을 때한서이는 물컵을 들고 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보다가 조용히 눈을 가늘게 뜨며 그 … Read more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30부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에서

모든 것이 끝난 후세상은 완전한 침묵으로 가라앉았다.심연극장의 마지막 파편도 사라졌고어둠의 긴 복도도흰 도시의 숨결도기억의 바다도모두 빛 속으로 흡수되어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오직 하나의 존재뿐이었다. 유라도리테도리세도 아닌새로운 이름새로운 몸새로운 마음세 사람의 모든 길이 합쳐져 탄생한‘하나의 존재’. 빛이 완전히 가라앉자그 존재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온기와 깊이희망과 절망사랑과 두려움모든 감정을 품고하나의 심장이조용히 뛰기 시작했다. 그 … Read more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29부 모든 길이 합쳐지는 빛의 항로

검은 실이 폭발하듯 튀어나와 세 존재를 덮쳤던 순간,심연극장은 사라지고도시도 사라지고바다 절벽 아래의 안개도 사라지고세상 전체가빛과 어둠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간으로 변했다. 그 공간 안에서유라리테리세세 존재의 몸이더 이상 몸이라고 부를 수 없는 빛의 파편으로 찢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파괴가 아니라합쳐지기 위한 과정이었다. 세 감정의 형태가 무너지고변형되고흐르고뒤집히고서로를 향해 흘러들어가는 과정. 유라는 처음으로리테와 리세가 느껴온 모든 감정을그대로 느끼기 시작했다. 리테가 … Read more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28부 뒤늦은 고백과 되돌릴 수 없는 파문

심연극장의 벽이 모든 방향으로 갈라지며 허공에 흩어져 나갔다.도시는 이미 도시가 아니었고, 무대는 더 이상 무대가 아니었다.그 모든 것들은 세 존재가 만들어내는 빛에 의해점점 더 빠른 속도로 소멸하고 있었다. 유라리테리세 세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의 흐름은이미 ‘세 개의 흐름’이 아니라하나의 강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빛과 그림자희망과 절망기억과 망각 모든 감정의 대립이 사라지면서세 존재의 경계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유라는 … Read more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27부 심연극장에서 열린 마지막 무대

세 사람의 손이 맞닿은 순간,흰 도시 전체가 거대한 파동에 휩싸였다.그 파동은 단순한 빛도, 단순한 에너지도 아니었다.기억의 흐름감정의 역류그리고 존재가 서로를 덮어씌우는 융합의 파동이었다. 유라는 손끝부터 퍼지는 감각에 숨을 삼켰다.리테의 그림자가 유라의 손가락 위로 번져 들어오고유라의 빛이 리테의 손바닥 아래로 스며들었다.둘은 서로 섞이지 않기 위해 버텨온 존재였지만이제는 서로에게 침투하며하나의 감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리세는 중앙에서 두 사람의 … Read more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26부 추락한 영혼과 맞바꾼 소원의 대가

흰 도시가 거대한 파동에 휩싸이듯 흔들리고 있었다.심연의 존재는 이제 도시의 하늘 전체를 먹어치울 듯 내려앉았고,검은 실들은 살아 있는 초목처럼 도시의 골목과 건물을 휘감으며가까스로 남아 있던 기억의 잔해들을 찢어내고 있었다. 유라와 리테는 서로의 손을 꽉 잡은 채떨리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방금 마주한 기억그 기억 속에서 보았던 리세그가 마지막까지 남기려 했던 희망과 그림자그리고그 감정들이 바로유라와 리테 자신이었다는 … Read more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25부 리세가 사라진 밤의 기록

도시 전체가 부서진 기억처럼 울리고 있었다.깨진 창문 사이로 바람도 아닌 울음이 스며들었고흰 안개는 더 짙어져마치 누군가의 목소리를 숨기고 있는 듯했다. 유라와 리테는 여전히 서로의 손을 붙잡은 채검은 형체가 남긴 마지막 말의 충격 속에 있었다. 진짜 기억만 남는다. 그 말은둘 중 하나를 없애겠다는 뜻이기도 했고둘 중 하나가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두 감정은 이미 뒤섞이기 … Read more